brunch

매거진 국내여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래볼러 Sep 16. 2022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라이딩 에티켓

하남시 SNS 미디어 크리에이터 활동의 8월 취재 주제가 '자전거타고 떠나는 하남 한강변'으로 선정되어 6백5천만 년 만에 자전거를 타게 됐다. 내 인생 마지막 자전거가 뭐였더라? 아! 무려 21단의 변속을 자랑하는 MTB(Mountain Terrain Bike, 산악지형용 자전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사서(당시 신상으로 단수로 최강자였다는) 대학생 때까지 줄기차게 우려먹었던 나의 SYSTEM-Y(자전거 모델명).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봤지만 구글도 초록창도,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갑자기 추억의 SYSTEM-Y를 떠올린 이유는 기어 변속이 고작 3단인 따릉이 때문. 사실 기어 변속 기능이 아예 없는 줄 알고 있던 터라 무려 3단의 기어 변속이 가능한 것에 놀라기는 했으나 막상 사용해보니(내가 유독 노후된 녀석을 고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기어는 실제 1단과 3단 두 가지 옵셥뿐이었다.(1단에서 2단으로 올리면 2단이 안 걸리고 바로 3단이 됐다ㅡㅡ;;) 그렇다 보니 1단은 다리에 타이어 묶은 듯 무겁고 3단은 바퀴가 헛도는 것처럼 가벼웠다. 중간이 없는 극단적인 변속.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될 때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나 갈팡질팡하다 결국 허벅지 운동할 겸 1단으로 평화통일을 했다.

1단으로 통일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달리는 속도 때문. 다리 아프다고 단을 올리면 페달이 가벼워진 만큼 속도는 느려지니 자전거 도로를 달리기에는 민폐가 따로 없었다. 물론 과속보다는 자기만의 속도로 가는 것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속도로에서 어린이 보호구역(시속 30km)에서 처럼 달리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오히려 과속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원활한 도로교통 상황을 위해 자전거 도로의 평균 시속보다 조금 더 빠르게, 터질 것 같다는 신호를 보내는 허벅지는 나몰라라 하고 1단을 고수했다.


강일역에서 따릉이를 빌려 하남으로 입성, 남한강 자전거길을 달렸다

서울 강일 고덕천에서 출발해 어느덧 하남 한강변으로 입성하고 터질 것 같았던 허벅지는 끝내 터지지 못하고 되려 힘이 빠져버렸다. 그러자 이때부터 자전거 타던 중 듣지 못했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뭐지? 이거슨 환청인가? 순간 깜짝! 놀랐다. 누가 내 뒤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는 '지나가겠습니다~'의 '다~'가 끝남과 동시에 바로 옆에서 자전거 앞바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움찔한 난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움직여 우측으로 붙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자전거 대여섯 대가 소시지처럼 줄줄이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라이더들은 나의 배려에(난 그저 놀라서 비켰을 뿐이나) 고마움을 표하며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네~네~ 가세요~ 훠이~~~

그 뒤로도 먼저 지나가겠다는 수많은 라이더들에게 양보의 미덕을 베풀었다. 자전거 경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빨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설사 승부욕이 발동한다 해도 그럴 수 있는 허벅지 상태도 아니었기에 내 옆을 추월해 가는 한 명 한 명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일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꾸 듣고만 있자 하니 문득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추월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배려를 받아보는 일, 콕 집어 말해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한마디를 해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따릉이를 반납하러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허벅지를 불살라 보기로 했다.

먼저 적당히 만만해 보이는 타깃을 물색했다. 젊은 사람은 패스, 최소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체력이 약해 보이는) 사람. 타이즈 착용도 패스.(보나 마나 고수일 확률 99%) 고사양의 고급 자전거도 패스.(설사 고수가 아니더라도 장비빨은 당해낼 수 없으니;;;) 그렇게 거르고 거르다 조건에 딱 들어오는 라이더를 포착했다. 저 멀리 앞에서 천천히 페달을 밟고 있는 어르신. 아직 허벅지에 에너지를 풀가동한 것도 아닌데 꽤나 거리가 금세 좁혀지는 걸 보니 조금만 부스터를 켜도 바로 추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다가가다 뒤꽁무니에 다다랐을 때쯤 핸들을 틀었다.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난 특별히 인공적인 눈웃음도 지었다.)


어르신께서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우측 밀찰 주행을 해주시며 길을 터주셨다. 굳이 가속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자칫 옆으로 나란히 가는 뻘쭘한 상황이 연출될까 싶어 두세 번 힘차게 발을 굴렸다. 아마 어르신도 유유히 지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계시겠지.

한번 하고 나니 재미가 붙어 또 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추월할만한 수준의 라이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라이팅 에티켓을 배우고 한번 써먹은 거에 만족하기로 하고, 훗날 따릉이가 아닌 내 자전거를 타고 라이딩을 나오게 된다면 그땐 반드시 저 말을 계속 내뱉으며 라이딩을 즐길리라.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잠깐 휴식
자전거 도로의 흔한 라이더
세 라이더들의 자전거가 모두 다르다
자탄풍 말고 자타풍(자전거 타면 보이는 풍경... 죄송^^;;)
하남 한강변 자전거길은 하남 유니온 타워가 보이는 당정뜰까지 이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와대에 다녀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