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나를 봅니다 (Wife sees me)
줄을 잡아당기자 손잡이가 돌아온다. 긴장되는 순간. 높이는 약 5m 남짓. 더 높은 곳에서도 짚라인 경험이 있는 나름 베테랑이지만 랜딩을 땅이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손잡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실한 막대기를 양손에 꽉 쥐고 갈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응원의, 아니 독촉의 환호성.
“파이팅! (얼른 뛰어라!)”
에라, 모르겠다! 아아아아악! 첨벙! 블루라군3의 상징이자 필수로 즐겨야 할 어트랙션인 짚라인, 일명 타잔놀이의 첫 경험은 뛰기 직전까지는 공포, 줄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에는 공포와 함께 어느 타이밍에 손을 놓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는 이성이 교차했고,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얼떨결에 손을 놓고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이에서 허우적대다 몸이 떠오르자 앞선 모든 감정은 사라지고 희열만이 남았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재미를 알아버린 난 곧바로 다시 올라갔다. 이번엔 비명 대신 신나게 소리 지르며, 호오오오오~ 첨벙!
타잔놀이도 했으니 블루라군에서 할 건 다 했겠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해서 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내가 고프로를 내 손에 고이 쥐여줬다.
“오빠 이거 들고 다이빙 좀 하고 와. 역동적인 영상을 찍어야겠어.”
이때는 몰랐다. 이것이 아바타 물놀이의 서막이 될 거라는 걸.
사실 다이빙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 짚라인과 비슷한 높이이기는 하나 손잡이를 잡고 떨어지는 것과 스스로 허공에 몸을 날린다는 건 180도 다른 이야기니까. 하지만 열화와 같은 성원(이것 역시 독촉)과 유튜브 영상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하고 다이빙대에 올랐다. 1차 시기, 실패. 후~ 호흡 한 번 크게 가다듬고 2차 시기, 읍! 첨벙! 역시나 끝나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나가서 뚝배기라면에 비어라오나 한잔해야겠다 싶었는데 이런, 고프로 렌즈가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찍으려던 건 내가 나오는 1인칭 시점의 다이빙 영상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난 다시 다이빙대로 직행했다. 이번엔 렌즈를 내 쪽으로 바꿔놓고, 첨벙! 책임감 있게 임무를 완수하고 물 밖으로 헤엄쳐 가고 있는데 또다시 들려오는 아내의 (검은) 목소리.
“오빠, 저기 외나무다리에서 외국인들이랑 배틀도 한 번 뜨고 와!”
하… 이놈의 느림보 자유형. 더 빨리 밖으로 나와버렸어야 했는데. 고프로를 니나킴에게 맡기고 결전의 외나무다리로 방향을 틀었다.
막상 치열한 승부의 현장 속에 들어오니 갑분 승부욕이 샘솟았다. 내 상대는 누구일까? 순서를 보아하니 이변이 없다면 아마도 장발의 서양인 남자. 구사하는 영어 발음으로 보아 미국인인 것 같았다. 덩치만 봐서는 한 번 해볼 만했다. 자신감 충만하게 올라가 외나무다리 출발점에 섰다. 한국 vs 미국, 외나무다리 빅매치 시작! 그런데 한 걸음 내딛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무가 생각보다 미끄러웠던 것. 아쿠아슈즈보다 차라리 맨발이 나았다. 상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맨발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난 스스로 만든 핸디캡을 안고 한 걸음씩 아장아장 전진했다. 마침내 격전지에 도착, 했다 싶은 찰나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균형이 확 무너지면서 난 세상 가장 억울한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그렇게 솜털 하나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완패. 졌지만 아내는 덕분에 예능짤 하나 건졌다며 만족했다.
외나무다리를 끝으로 이번에는 진짜 진짜 아바타 물놀이가 끝이 났다. 겉으로 너무 좋아하면 아내가 삐질까 봐 기쁨의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아바타 물놀이 끝! 하... 이제 더는 못 해! 안 해! 지칠 대로 지친 난 물에 젖다 못해 절어 축~ 늘어진 파김치가 되어 뭍으로 올라왔다. 육지가 이렇게 편안한 곳이었던가? 한참을 발이 안 닿는 물속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중력의 법칙을 직방으로 받으며 딱딱하고 거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있으니 온몸에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아바타 물놀이를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테이블에 앉아 (어쩌면 나의) 물놀이를 관전하며 후루룩 짭짭 뚝배기라면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내게도 뚝배기라면이 대령됐다. 츄릅! 국물 한 숟가락 뜨고 호로록~ 면치기 한 젓가락 하니 크으~ 아재들 전용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블루라군에 물놀이를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난 뚝배기라면을 먹으러 왔나 보다. 순간 모든 힘듦이 사라졌다. 이런 게 진정한 행복이고, 여기가 진정한 파라다이스였다.
비록 몸이 떨릴 정도로 춥고 당이 떨어져 고된 힘들었지만 뚝배기라면에 비어라오 한 모금하며 돌이켜보니 내 생애 가장 청춘스러운 시간이었던 건 분명했다. 이래서 아내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는 건가? 나에게 이런 청춘스러운 시간과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내어 주신 아내님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꾸벅)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다이빙 영상이 없다;;; 아마도 전원만 켜고 녹화 버튼을 누르지 않은 듯...?! 내 생애 가장 청춘이었던 순간의 기록이 모조리 증발됐다. 아아아악~~~ 내 청춘 돌리도~~~ㅠㅜㅠ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