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비엥에서 시전한 한국의 '잠시만'. 그리고 '빨리빨리' 문화
2일간의 짧은 방비엥에서의 머묾이 아쉬워 체크아웃 시간을 꽉꽉 채우고 나왔다. 이제 다시 비엔티안으로 돌아갈 시간. 비엔티안에서 오후와 저녁을 보내고 밤비행기이자 다음날 새벽 비행기이기도 한 00시 05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 다섯 청춘들은 라오스에 온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무겁고 느렸다.
방비엥까지는 프라이빗밴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틀 전 비엔티안에서 방비엥으로 올 때 미니밴을 이용하면서 겪었던 작은 불편들을 지금은 견뎌낼 의지가 없었다. 그때는 텐션이 좋아 사실 불편한지도 잘 몰랐지만 체력도 고갈, 멘탈도 고갈된 지금은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신경이 곤두서는, 아니 곤두설 여력조차 없는 텐션이었다. 게다가 여유 있게 환전을 해온 것에 비해 생각보다 현금을 많이 쓰지 않아 킵(라오스 화폐)도 제법 여유 있게 남아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돈으로 편안함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프라이빗밴을 기다리는 동안 남쏭강을 따라 걸으며 방비엥에서의 마지막을 달랬다. 도착한 날에는 그렇게 에너지 넘쳐 보였던 남쏭강이 떠나기 직전인 지금은 그렇게 차분하니 담담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람 마음 따라 보이는 시각도 느낌도 달라지나 보다. 강변길이 끝나는 모퉁이에 길거리 샌드위치 가게가 보였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가게로 이틀 동안 이쪽 길을 지나다니며 한 번쯤은 먹어보고 싶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마침 시간도 있고 하니 각 1 샌드위치에 로띠 하나를 시켜 방비엥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방비엥 여행자거리의 그곳, 렝블리 이모네와는 또 어떤 다른 맛일지, 정말 렝블리 이모네가 독보적인 맛집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미 메뉴는 정해져 있었지만 예의상(?) 메뉴판 구경을 먼저 했다. 시작부터 다소 실망스러웠다. 메뉴야 뭐 거기나 여기나 베이스가 바게트 빵이고 속재료 조합의 차이라 약간 달라도 거기서 거기였는데, 가격은 거기와 여기였기 때문. 호텔 바로 근처라 지역 프리미엄이 붙은 걸까?(곱게 표현했지만 일명 바가지) 물론 우리나라 돈으로는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4일간 라오스 패치가 되다 보니 5,000킵 더 붙는 게 왠지 5,000원 더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대략 340원 차이...^^;;) 뭐 맛이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부디 340원만큼의 맛 차이가 있기를 기대하며 주문을 마쳤다.
샌드위치 가게 옆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엄밀히 샌드위치 가게의 공간은 아니고 근처 식당의 야외 테이블이지만 서로 돕고 돕는 사이라 그런지 괜찮다고 했다. 함께 나눠먹을 메뉴인 누텔라 로띠가 먼저 나와 시원한 그늘 속에서 로띠를 먹으며 다시 방비엥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 가게 앞을 지나가며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드는 백발의 노부부가 보이길래 봤더니 바로 우리 옆방에 머물고 있는 스위스 노부부였다. 수개월간 아내와 함께 둘이서 세상 구경을 하고 있다는 나의 인생 롤모델 같은 부부. 심지어 은퇴 여행이 아닌 휴가라는 사실. 이건 내가 자영업을 하고 수개월간 알바생을 써서 영업장을 돌리지 않는 이상(하지만 자영업을 하면서도 그러기도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야말로 잠잘 때나 꾸는 꿈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당신에 대한 부러움과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실망감으로 울상이 된 나에게 그가 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너도 언젠간 우리처럼 할 수 있을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평온한 바이브는 여기까지. 평온하기만 한 건 역시나 우리 다섯 청춘들의 여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의 평온을 깨뜨린 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프라이빗밴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샌드위치가 나왔다. 단, 일부 몇 개만 나왔다. 나머지는 취소해 달라 할까 싶어 얼른 샌드위치 가게로 달려갔으나... 치이이익~~~ 팬 위에는 이제 막 올라간 재료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시작했기에 멈출 수도, 취소도 안 된다는 얘기.
"대충 얼마나 걸릴까요?"
"한... 15분에서 20분 남짓이요."
일단 프라이빗밴 기사님께는 '잠시'라고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이기는 했는데 시간이 돈인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차마 '20분만 더'라고 양해를 구하기가 미안했다. 더구나 가격도 흥정할 대로 다 했기에 더 그랬다. 그냥 우리가 남은 샌드위치를 포기하던지, 아니면 샌드위치 가게 이모님을 닦달하던지 둘 중 하나였다. 그래도 방비엥에서의 마지막 만찬인데 포기할 수는 없어 기사님께는 미안하지만 후자를 택했다.
"먼저 되는 것부터 바로 주시고요, 잘 안 싸도 되니까 대충 눌러 담아주세요~ 조금만 빨리 부탁드려요!"
아마도 처음 겪어볼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문화에 가게 이모님들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특히 샌드위치를 포장하는 보조 이모의 눈에서는 동공지진이, 손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보였다. 안쓰럽기도 하고 역시나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포장을 기다리며 운 좋게도 먼저 나왔던 나는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말 그대로 먹은 게 아니라 먹어서 치워버렸다. 상황상 그렇게 짐스러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맛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진도 찍지 못했다. 방비엥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렝블리 이모네와의 승부도 기약 없는 언젠가로 미뤄져 이번 방비엥 여행에서는 결국 렝블리 이모네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마침내 나머지 샌드위치들이 나왔다. 400m 계주의 바통을 이어받듯 샌드위치를 받자마자 프라이빗밴이 기다리고 있는 숙소 앞으로 달렸다. 무사히 전원 탑승 완료! 기사님께 미안하고 고맙다며 인사를 하면서도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의자를 뒤로 눕혔다. 이제 다시 평온한 바이브를 즐길 시간. 2시간 뒤면 비엔티안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