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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May 21. 2018

썸머타임

#10. 당신의 썸머타임은 언제입니까?


 2017년 3월 26일 아침. 그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별 다를 것 없이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는데 괜히 피곤한 느낌이었습니다. 요즘따라 부쩍 잠도 많이 오고 기력이 없어 스물아홉의 체력적 한계를 체감하며 통탄하고 있었지요.  월요일에 학원에 갔더니 '썸머타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썸머타임이란, 유럽에서 길어지는 낮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시곗바늘을 1시간 앞당기는 제도인데, 과연 신기하게도 밤 10시까지도 오후 4시처럼 밝은 하늘과, 밤이 아닌 이른 저녁시간에만 들을 수 있던 식기류 부딪히는 소리와 같은 시끌시끌한 소음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늙은 게 아니라 갑자기 1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몸이 더욱 예민해지고 있군. 훗!' 괜스레 제 몸뚱이가 기특하게 느껴졌습니다.  4월이 지나고 나니 날씨도 선선해져 그리 우중충했던 아일랜드의 계절도 정말 바뀌는구나 싶었지요. 한국에선 아무리 여름이라도 저녁 8시면 해가 졌던 것 같은데. 이렇게 또 한 번 내가 지금 한국의 반대편 땅을 밟고 있구나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썸머타임을 두 가지 이유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9시간이던 시차가 8시간으로 줄어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싶을 때 엄마 아빠가 자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고 다이얼을 누를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분명 같은 시간임에도 낮 시간이 길어져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학원 수업이 아일랜드 시간으로 오후 1시, 한국 시간으로는 밤 10시에 끝나다 보니 점심을 먹고 전화를 하기엔 엄마 아빠에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고픈 배를 움켜쥐고 엄마와 엔들리스 수다를 떨곤 했었지요. 고작 1시간 줄어들었음에도 점심을 먹고 넉넉하게 엄마와 이러쿵저러쿵 긴 시간 동안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습니다. 또, 가끔 낮잠을 자면 하루가 다 가버려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썸머타임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하루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아도 책을 읽거나 글을 좀 더 써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곤 했습니다. 10시에 아르바이트 퇴근 후 버스를 타고 동네에 내려 핑크빛 하늘 아래에서 선선한 바람에 치마를 팔랑이며 걷다 보면 별 거 아닌 그 순간이 그리 청량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무덥지 않아도 여름이구나 싶었지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내 삶에 있어 썸머타임은 언제였나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3년,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의 저는 한창 지역공동체 라디오국에서 인디 음악 프로그램을 연출하며 고막이 닳도록 들은 노래, 마음이 녹아내리도록 곱씹었던 가사를 만든 뮤지션들에게 수줍은 도서관 고백 쪽지처럼 섭외 요청을 하고 스튜디오에서 라이브한 얘기를 나눴었더랬죠. 통근시간이 길기도 했고 밤 프로그램이라 끝나고 DJ나 게스트들과 맥주라도 한 잔 하는 날에는 늦은 새벽에 귀가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과에 살도 많이 빠질 정도로 체력이 달렸지만 두 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반짝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어떤 곡들을 선곡할까 새로 나온 음원들을 틀어놓고 어떤 오프닝 원고를 써볼까 즐거운 고민들만 했던 그 시간들. 특히나 제가 유독 좋아하는 게스트가 나오는 날이면 전날부터 심장이 콩닥콩닥했던 아직은 소녀였던 때.     


 이건 내 천직이구나 싶어 지상파 방송국 입사에 도전했던 스물여섯은 이대 스터디룸과 동네 독서실만을 오갔던 어찌 보면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그때의 저는 날이 잘 갈린 스케이트를 타고 있듯 멈출 기미가 없었지요. 날마다 신문을 읽고 시사상식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지금은 아마 그렇게까지 열중해서 공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열정이 빛을 발해 좋은 성과를 거둘 때도 있었지만 결국 저는 흔히 말하는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케이트를 신나게 쌩쌩 타다가 한 번 넘어지니 생각보다 타격이 커, 그냥 그대로 운동화로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 한동안은 빙판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은 느낌이었지요. 그 후론 그렇게 열광하던 라디오마저도 거부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열정도 너무 태우고 나면 검은 재만이 타닥타닥 남나 봅니다. 내후년을 기다리기엔 내 나이 스물여섯은 너무 늦었다며 결국엔 꿈을 잠시 접고 현실로 눈을 돌렸었습니다.     


 또 그런 썸머타임을 만날 수 있을까? 현실에 안주한 이후의 일상은 늘, 나도 모르는 사이 미세먼지를 천천히 마셔온 듯 텁텁하고 황량하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친구에게 맥주 한 잔 하자며 전화가 왔습니다. 피곤하기도 했고 10시도 넘은 늦은 시간이라 “안 돼. 시간이 너무 늦었어.”라고 말했더니 친구는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지금 이렇게 대낮같이 밝은데!”라고 하더군요. 저는 버스 안에서 밝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하하. 네 말이 맞다.”하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친구를 만나러 갔지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하루를 잘게 잘게 쪼개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 고마운 존재이지만 가끔은 이유 없는 일탈이 절실할 때 우리를 그만큼 제한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썸머타임이니까. 꼭 제재하지 않아도 되는 충동이라면 잠깐 나를 풀어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까지 더블린에 머물게 되면 두 번째 썸머타임을 맞이하겠구나.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는 이 곳의 썸머타임처럼 나의 썸머타임도 어떤 일정한 주기를 타고 돌아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첫사랑만큼이나 가슴을 앓았던 저의 첫 썸머타임을 지금 이렇게 느지막이, 아주 서서히 지는 더블린에서의 해와 함께 미련 없이 흘려보내 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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