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타지에서 아플 때
크리스마스 이후 와인 섭취량이 급격히 늘어나더니 결국엔 탈이 난 모양입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가슴이 찌릿찌릿 저려옵니다. 무슨 일이지? 소화가 안 되는 건가.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통증은 더욱 심해져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새벽이 깊어가니 통증도 지쳤는지 얕게나마 잠이 들었고 다음 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출근을 해서도 누군가 윗배를 안에서 꽉 쥐어짜는 듯하는 느낌에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매니저를 불러 조퇴 요청을 하고는 벨기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집 앞 병원으로 직행했을 텐데. 아일랜드에서는 병원에 가기 전 GP등록이니 뭐니 복잡한 절차도 있고, 의학용어를 영어로 듣는 것조차 혼자서는 영 두려웠습니다.
고맙게도 친구는 수소문을 하여 한 응급실을 알아봐 주었습니다. 하필 토요일이라 다른 병원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지요. 일단 친구가 보내준 지도를 따라 응급실로 가는 트램을 타고 접수처로 들어서는 순간 보이는 순번표. 그리고 그 밑에 빨간 글씨로 ‘4시간 대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후에 친구가 도착했고 저 대신 접수처에서 용지를 받아 이것저것 꼼꼼히도 체크해주며 문진표를 작성해주었습니다. 잠시 대기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응급 환자들은 계속해서 들이닥치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오는 여학생.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아저씨의 등장에 나는 환자 자격요건 미달이 아닌가 고민마저 하게 되었지요. 한참 기다린 후, 간호사의 호출에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혈액을 뽑고 맥박을 재더니 1부터 9까지 고통의 정도를 말해달랍니다. 아까 피를 흘리는 아저씨를 보고 도저히 높은 숫자를 말할 수는 없어 너무나 양심적이게도 6 정도로 대답하고는 다시 대기실로 나왔습니다.
나와서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이런! 9라고 말했어야지! 그에 따라 누굴 먼저 들여보낼지 결정한단 말이야.”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장장 4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와중에 중상환자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저는 배를 움켜쥐고 정신 한가닥 정도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요. 드디어 불리는 저의 이름. 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이 추상적인 아픔에 대한 묘사가 한국말로는 찰지게 떠오르는데, 어떻게 영어로 말해야 하나. 아주 더듬더듬 제가 1차 번역을 하면, 친구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명확한 단어로 2차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위염’이랍니다. 친구 중에 잦은 위염에도 늘 소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이가 있었는데, 이 자식 진짜 미친 자식이었구나 싶었지요. 의사가 주는 핑크빛 액체 약을 마셨더니 속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합니다. 또 한참을 기다린 끝에 처방전을 받아 겨우겨우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진료비용은 €100. 학생보험을 들어놓았고, 그 언젠가 €100 이상이면 환급이 가능하다고 들어 아쉬움 없이 바로 결제를 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100 이후의 결제금액부터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돈이라 하여 눈물을 머금고 전화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약국에서 약을 받고 집에서 죽-약-죽-죽-약과 같은, 가장 느리다는 진양조장단과 같은 삶을 약 3주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병원에 다녀온 며칠 후, 조금 괜찮은가 싶어 작은 초콜릿을 하나 삼켰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주 죽다 살아났지요. 그 이후로는 죽이나 호밀빵과 같은 허용된 음식 외에는 일절 금식. 사실 위염이라는 병이 치료가 어려운 것도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섭진 않았을 텐데. 하필 타지에서 병원에 재방문하는 것조차 두려운 이방인의 처지가 못내 서러웠습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옛 말 틀린 것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살이 빠져서 조금 기뻤다는 것. 그래도, 역시나 건강이 최고라는 것을 굳이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 아일랜드 병원 TIP : 보통은 GP라는 곳(구역마다 있으니 구글에서 본인과 가까운 곳을 찾아서 전화)에 예약을 하고 방문해야 합니다. 간단한 질병 같은 것은 진료해주고 약도 처방해주지만, 큰 병원에 갈 일이라면 이 곳에서 소견서를 써준다고 합니다. 너무 아플 때에는 응급실에 갈 수도 있고, 구글에 잘 찾아서 전화해보면 GP를 굳이 들르지 않아도 바로 진료 예약을 잡아주는 곳이 간혹 있으니, 이 점 참고하세요. 학생보험이 있다면 첫 €100는 본인 부담, 그 이후의 금액부터는 약값 포함 전액 환급입니다. 병원비가 비싸긴 하지만 돈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니 부디 아플 때 참지 마시고, 걱정되면 영어를 잘 하는 친구라도 데려가서 바로바로 잘 해결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