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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Feb 21. 2021

열려라, 열려라!

연기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

“열렸어? 너 지금 닫혔지?”

“그...그런 거 같아요...!!”

“빨리 열어! 빨리! 지금 열어!!”

“안 열려요, 쌤! 어떡해요!!!!”

“뭘 어떡해! 누가 그걸 기다려 줘? 열렸다고 생각하고 시작해. 열렸다! 시작!”


도대체 뭐 하는 건가 싶겠지만 요즘 내가 듣고 있는 연기 수업인 화술 수업의 풍경이다. 선생님을 포함하여 여덟 명의 사람이 대학로의 한 연습실에 모여 '무언가'를 열기 위해 정말이지 눈물나게 노력 중이다. 열리지 않는 동굴 문 앞에서 발을 구르던 알리바마의 40인의 도적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물론 우리가 열려는 것은 보물이 가득한 동굴 문은 아니고 일명 ‘조리개’다.


여기서 ‘조리개’란 '마음의 문'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선생님들마다, 그리고 연기 수업마다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이 열어야 할 건 본인의 마음의 문일테니 말이다. 11포인트로 열 줄 정도 되는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는 것이 수업의 첫 시작인데, 그걸 마음의 문을 열고 읽어야 하기애 저 난리를 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읽고 준비해 온 각자의 글을 읽어내는 수업은 대략 4단계로 진행되는데 일단은 한 명씩 ‘그냥’ 읽는다. 그 다음은 ‘조리개’를 열고 읽는다. 이 때 조리개를 열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된다! 과연 지금 나의 조리개가 열렸는지 의심하거나, 어느 정도 열렸는지를 가늠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미 열었다고 믿어야 한다. 이미 열었다는 믿는 준비가 됐다면 이번엔 ‘듣는 귀’인 청자와 아이컨택을 시작한다. 잘 안 되면 글을 읽기 전에 ‘아~ 이 말이 이 말이구나~’와 같은 추임새도 곁들인다. 그러면 정말 그 말이 나와 가까워지고, 다 알게 되는 것 같다는 게 선생님의 조언이다. 다음 단계는 이제 종이는 내려놓고 그 글을 자기 말로 설명해본다. 나한테 이 글은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글을 어떤 글인지. 마지막으로 또 그냥 ‘다시 한 번’ 읽는다.


재밌는 건 나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냥’ 읽을 때 가장 실수를 많이 한다. 경직되고 버벅거린다. 발음은 뭉개지고 씹힌다. 다른 누구보다도 ‘잘’ 읽으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유능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그 모든 실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잘 읽으려고 마음 먹을 때, 안간힘 쓸 때 가장 못 읽게 되어버린다.


그 다음 ‘조리개’를 열고 읽는다고 생각할 때는 이전보다는 훨씬 분명하고 스무스해진다. 리드미컬하고 유려하다는 느낌도 든다. ‘듣는 귀’들과 아이컨택도 했으니 좀 열린 것도 같고, 점점 자신감도 붙는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조리개’를 연 척하고 읽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아이컨택을 한 게 아니라 아이컨택한 척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아이컨택을 했으면 표정이 그렇게 편안할 리 없다는 게 선생님 말씀이셨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무안하고 떨리고 아슬아슬하고 그래서 아주 흥미진진한 상태가 조리개가 열린 상태인데 그렇게 ‘듣는 귀’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반응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 자기 말로 설명할 때는 이전과는 또 달라진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바로 우리가 손짓을 격렬하게 해댄다는 사실이다. 한 시도 가만있지 않게 된다. 상대에게 내 말을 잘 이해시키고 싶어서 친절해지는 것이다. 선생님 표현대로라면 우리 몸이 절로 ‘꿀렁’거린다. 상대에게 내 말을 이해시키고 싶다는 의지, 이 글이 나에게 기뻐서든 슬퍼서든 화가 나서든 무서워서든 아주 중요하기 떄문에 이걸 지금 말하고 있다는 게 모두에게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읽었을 땐 이제 모두들 잘 읽으려고 경직되거나, 무언가를 잘 표현하려고 오바하지 않는다. ‘그냥’ 읽는다. 자신이 선택해 온 문장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감정과 연결되어 있을 터이니 그걸 믿어보는 거다. 감정은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 이 글을 굳이 남들 앞에서 읽으려는 의지가 이미 역동성 그 자체일지니.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 때 무언가가 표현되는 그 아이러니! 나는 이번에 읽을 땐 내가 가져온 글 때문에 좀 울컥해져 울 뻔도 하였는데 이때 나의 자의식이 그걸 또 한 번 막아냈다. 조리개가 닫히는 순간이었고, 그게 느껴지니 나도 참 아쉬웠다.


그럼 이럴 땐 어떡하냐고? 그냥 또 하는 거다. 닫혔다 열었다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그냥 계속해 나가는 거다. 시간이 되면 배우는 앞에 나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공연 전 날이면 예외없이 죽고 싶지만 공연은 늘 예정대로 시작되고, 카메라는 나의 상태와 무관하게 세팅이 완료되면 눈 앞에 있다. 그땐 정말 뭐든 해야 한다. 그러니 잘 하겠다는 마음, 내가 더 괜찮은 인간이자 배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버려야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려는 이유, 내 말을 잘 전달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비단 연기를 할 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연기를 배울수록 나에게 정말로 좋은 걸 선물받고 있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이다. 이 흥미진진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다.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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