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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Nov 13. 2022

미래의 나와도 미리 화해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태어날 줄 몰랐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음이, 좀 더 상냥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에서 이 책이 출발했다. “모르겠다”라는 진술과 싸우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표현들의 힘을 빌렸다. 이것은 시간 여행 없이 나의 과거 혹은 미래와 화해하려는 기록이다.
<젊은 ADHD의 슬픔>, 12p



나를 설명하는 주요한 키워드는 ‘양가적인 감정’이다. 쉽고 강렬한 단어로 말해보면 ‘분열’이 될 것이다. 분열적인. 양가적인. 종 잡을 수 없는. 예측이 불가한. 이런 설명들은 나의 매력일 수도 있기에 나의 애착을 받았고 동시에 고통이기도 해 나의 미움을 받았다. 그렇다. 나는 나의 이 ‘분열’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게 나의 주요한 특성이 될 정도로 유의미한 정보 값이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성인이라면…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 게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남들은 정말로 그렇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그러니까 남들은 본인에 대해서 외부에 대해서 단 하나의 감정만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이 좋으면서 싫지 않다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하지 않는다고? 위안받으면서도 외롭지 않다고? 둘 중에 딱 하나만 느낄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는 나에게 정신과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모든 것에는 당연히 장단점이 있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단점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요. 이런 단점이 있지만 나는 이게 좋다, 이런 장점이 있더라도 나는 이게 싫다. 그 코어는 바뀌지 않아요. 그런데 코어가 계속 바뀌는 건,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건 본인에게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어요.”


평가와 판단과 감정의 코어가 수시로 바뀌는 나는 이제야 이게 문제가   있다는  인지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이게 나의 독특함이자 감수성이라 생각했는데 나에게 혼란과 긴장과 분열을 주는 주요한 원인이라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는지, 하나의 판단을  내릴  없는지 알아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나는 기쁘고 즐겁게 하고 싶다. <젊은 ADHD의 슬픔> 문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냥하고 재미있게’. 이 작업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는 이상한 애를 치워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일이자 미래의 나와도 미리 화해하는 일일 테니까. 지금 나는 과거와 미래의 나를 향해 동시에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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