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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Nov 14. 2022

용기는 뺐다

어떤 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병의 세계. 왜 그런 얘기를 꺼내냐고 반문하는 세계의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네가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을 잇기 위해 뛰어드는 이들을 생각한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29p




올해 가장 잘한 일은 본격적으로 정신과 치료와 심리 상담을 시작한 일이다. 경미한 공황 증세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도 정신과를 내원한 적은 있지만 규칙적으로 가질 않았고 멋대로 단약을 해버렸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가지 않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고 나와 내 주변 이들을 힘들게 했다. 결국 그러지 않아야 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큰 실수를 한 뒤 내가 나를 정신과에 다시 끌고 갔다. 종합심리검사(지능 검사, 문장 검사, 우울증 검사 등)까지 마쳤고 ADHD 검사도 남아있다. (우울감이 좀 가신 다음에 ADHD 검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경과를 보는 중이다) 진단명을 빨리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10가지의 어려움이 있다면 우선 그 어려움의 가짓수를 줄이는 데 집중해 볼게요. 그러면서 핵심적인 문제를 추려나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해봐요”


정신과에서는 진단명보다 증상과 패턴이 중요하다고 한다. 검사 결과 나의 진단명은 양극성 장애인 조울증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만의 증상과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거기에 더해 지금은 10가지 모두 어렵겠지만 점점 5가지로, 3가지로 줄여나가면서 내 문제의 핵심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상담 선생님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왜 상담을 하려 하냐는 질문에 나는 같은 실수를 너무 반복한다고 답했다. 그때도 나의 정확한 진단명을 알고 싶다고 했다. 진단명을 정확히 알면 내가 빨리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집단이 있으리란 생각에 미리 안도감도 든 것도 사실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셨는데 살면서 그런 방식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거든요. 그게 다 적응이에요. 정확한 진단명도 중요하지만 저랑 하게 되는 작업에서는 어떤 게 어려운지 어떻게 바뀌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에요.”


늘 내가 이상해서, 특이해서, 미성숙해서 일을 그르친다고 자책만 했는데 그런 방식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을 거라는 말에 위로받았다. 다시 한번 진단명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는 걸 배웠다.


조급하지  , 진단명에 숨어 나만의 어려움을 가리지  , 충분히 위로받을 . 초보 ‘정신병자’(나는  말을 멸칭으로 쓰고 있지 않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에서처럼 자조적 일지 언정 스스로를 유머러스하게 긍정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명심해야  기본자세라 생각한다. 용기는 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을 잇기 위해 뛰어드는 이들이라면 이미 충분히 용감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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