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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Nov 22. 2022

미로 속에서 퍼즐 맞추기

정신질환은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행위와 거리가 멀다. 파악과 분석은 특정 좌표(자기인식)를 기반으로 전후좌우 살펴 이루어지는데, 정신병의 상태에서는 자신이 딛고 있는 곳 자체가 마법의 양탄자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녀 버린다. 우리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과거의 상태를 깨닫거나, 현재 가진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거나, 미래의 일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혹은 아예 미래에 무심하거나 하는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병들의 경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시간이 먼저 가버리거나, 시간을 저만치 두고 사람이 뛰어가는 등 난리도 아니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39p



"친구들이 저한테 그랬거든요.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도대체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지 싶었는데 약을 먹으니까 신경이 안 쓰이더라구요. 그래서 아~ 사람들이 말하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고 있어요."


약을 먹으면서 경미한 부작용도 있지만 좋은 점은 이런 거다. 내가 더 이상 신경 쓰기의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나는 하물며 누군가와 카톡을 하다가 상대의 답장이 너무 늦거나 뭔가 어투가 미묘하게 달라지면 그것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면서 신경을 쓴다. 내가 했던 말들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복기하고, 상대의 반응을 떠올리면서 초단위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약 복용 4주 차에 접어드니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냥 늦으면 늦은갑다~, 나한테 관심이 없는가 보다~ 하고 끝이 된다. 크게 상처받지 않고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다. 나는 이어서 내 진짜 진심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걸까요? 뭔가 제가 더 이상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요선 씨, 그럼 다른 사람들은 신경을 어떻게 안 쓸 수 있는 걸까요? 분명 신경 쓰이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는 뭘까요?"

"음,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신경 쓰이는 일이 일어났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죠? 약 때문에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면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거예요. 요선 씨 검사 결과를 보면 방어기제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특징이거든요. 자신을 위해서 방어기제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요선 씨는 그게 아예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에 그대로 노출될 가능성이 커요. 말이 나왔으니까 이어서 이야기해볼까요? 요선 씨를 자극하는 건 어떤 거예요?"


"저는 일단 쎄한 상황 감지를 잘 하구요. 그래서 누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으면 바로 느껴요. 신경도 많이 쓰이구요. 예전에는 심했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냥 저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나 보다 하고 넘길 수 있게 되었어요. 그다음은 나르시시스트를 만나면 저는 진짜 자극받아요. 완전히 돌아버려요."


진짜로 돌아버릴 것처럼 힘주어 이야기하자 상담 선생님은 웃었다. 재미있다고.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본인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흔적이 보인다고.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했다는 건 그만큼 혼란스러웠을 거라는 말까지 듣고 있자니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진정시키고 싶어 했던 나날들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언제나 내 가슴 한편에 아직도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20대 내내 그토록 방황했던 이유도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르시시스트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나르시시트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는 무조건 피해요. 싫어하는 마음이 감당이 안되거든요. 자기애가 강하고 그걸 스스럼없이 전시하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여왕벌처럼 군림하는 사람을 보면 진짜 자극받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부러워서 그렇게까지 싫은 건가 싶기도 해요. 저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은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까. 남자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나르시시스트인지 빠르게 캐치하고 피하는 건 감이 좋은 건데 그런 사람이 싫으면서 부럽다고 말하는 건 왜인지 이야기가 나왔다. 애정을 받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보니 25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다. 싫으면서 부러운 양가감정, 인지부조화, 애정 문제, 애착 관계, 아빠의 죽음, 애도 등. 시간이 많지 않아 맛보기로 이 문제들을 빠르게 훑기만 했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상담은 퍼즐 맞추기와 같다고 했다. 2500 피스쯤 되는 거대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작업과 같다고. 언젠가는 "아! 그래서 내가 그때 그랬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같이 열심히 이것저것 탐색하며 헤매 보자고.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게 되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기게 될 거라고. 꼭 약으로 인위적으로 모든 스위치를 끄지 않고도.


흩뿌려진 퍼즐 조각 앞에 서 있는 나는 아직 미로 속에 있는 것만 같다. 25년 전 아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업을 이제야 시작해야 함을 예감하면서. 그러고 나면 엄마와 할머니와의 애착 관계, 불우했던 10대, 지난 연애 등의 퍼즐 조각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야기할 거리가 무척이나 많아서 좋다고 생각해보련다. 달리 다른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이 퍼즐이 그냥 주어졌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퍼즐 조각을 이제 막 하나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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