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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Jul 07. 2023

잘 모르겠다고도 말하는 사람

지쳤어요. 쉴 수만 있다면, 쉴 수만 있다면. 나는 갈매기죠. 아니, 나는 배우야. 그 사람도 있네요. 괜찮아요. 그 사람은 연극을 믿지 않아. 내 꿈을 비웃었어. 얼마 안가서 나도 연극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겠지. 나는 넋이 나가버렸고, 사랑과 질투, 그리고 아기에 대한 걱정으로 항상 불안에 떨었어요. 평범하고 옹졸한 인간이 되어버리면서 연기도 형편없어졌어요. 나는 갈매기에요. 아니야, 이런 얘기 하려는 게 아니었어. 무슨 얘기하고 있었죠? 내 연기에 대해서.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젠 진짜 배우에요. 무대 위에서는 취해요. 거기에 서면 내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여기 온 날부터 걸었어요. 계속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내 마음과 내 영혼이 점점 강해가는 걸 느꼈어요. 이제 알겠어요. 작가든 배우든 간에 우리 일은 명예나 성공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돼요. 이제는 믿음이 생겼어요. 이제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요.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아요. 내가 위대한 배우가 되면 꼭 와서 봐야 돼요. 약속할거죠? 지금은 늦었어요. 옛날에는 모든 게 아름다웠어. 기억나.

영화 <자유연기> 속 '갈매기' 대사




1. 나는 확실히 에너지 레벨이 떨어졌다. 빡세기로 소문난 곳들만 골라 구른 탓인가 싶기도 하고 나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빡치는 회사도 다녀봤고 질리는 회사도 다녀봤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때는 더 잘해보고 싶었다. 뛰어난 혹은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새벽 3시까지 일을 할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1-1. 어제 조촐한 회식을 했다. 헛소리를 하며 막걸리를 마시는데 똘똘하고 열정적인 인턴 친구가 초기 투자업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다들 진지하게 대답했고, 나는 계속 헛소리를 하고 싶었다. 그나마 흥미로웠던 건 '투자업의 본질이란 건 없고,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대답이었다. 다들 어깨에 힘주고 똑똑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다른 플레이를 시도해봐야 한다고. 실패하더라도 그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시니컬한 와중에 열정적인 이 이상한 분위기. 내가 그래도 여기 왜 앉아 있는 건지 납득이 되었다.

 
1-2. 대표님과의 면담.

"베키가 원하는 커리어는 뭐예요?"

"이제 잘 모르겠어요. 방향성을 잃은 것 같아요. 일단은 결과를 내는 데에 집중하려고요."

"이 프로젝트 결과가 좋으면 베키가 원하는 커리어가 찾아져요?"

"솔직히 그건 아닐 거 같아요."

"고민을 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민의 결과를 가져와주세요."




2. 회사에서 하게 된 새로운 프로젝트는 Exceptional Talents와 그에 준하는 창업자들을 매칭시켜 주는 일이다. 소위 말하는 탑티어 탤런트 분들과 대단하기로 유명한 대표님들을 많이 만나봤기에 내가 적임자일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제 잘 모르겠다. 좋은 개발자란 게 도대체 뭔데? 논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익스트림 오너십이란 게 진짜로 있어? 여러 조건들로 필터링할 수야 있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는 법이다.


2-1. 회사 시니어 분과 함께 탤런트풀에 모실 만한 분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내 지인이기도 하신 지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분 어떤 것 같으세요?"
"베키가 추천하신 분이니까 일차적으로 믿음이 가고요. 저희가 찾는 분이 맞는 것 같아요."
"어떤 점이요?"
"자신감 때문에요. 스타트업에서 Key Man으로 성과를 내려면 일단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자신감이 있으시니까 일단 하실 것 같으세요. 눈치 보면서 실수할까 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최악인 것 같아요."


일단 하는 사람. 메모했다.



3.  내 상담선생님은 내가 정말 까다로운 내담자라고 매번 말한다. 본인이 느끼는 불편감은 단순화시키는데 표현 양식에는 레이어가 많아서 읽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 그거 별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러다가도 또 바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다고.


처음에는 이 사람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건가? 의심했는데 의도해서 속인다기보다는 본인도 지금 잘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 같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주었다. 본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본 경험이 없어서일 거라고도 했다. 요선 씨가 얼마나 답답하고 혼란스러울지 이제야 알겠다고 하면 나는 또 눈물을 뚝뚝 흘린다.


3-1. 최근에 한 남자가 내가 이성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말해주었다(ㅋㅋㅋ)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는데 다 맞는 말이라고 수긍하면서도 반항심이 일었다. 그래, 너 말이 다 맞아. 그렇지만 난 다른 걸 기대해볼래.


3-2.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어떤 걸 원하냐고 계속 질문 받는 중이다. 직장에서도, 연기를 하고 글을 쓸 때도, 관계를 시작해보려 할 때도. 너의 커리어 골은 뭐야? 넌 네가 배우가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 믿음이 보이지 않아. 그래서 쓰고 싶은 글이 뭔데? 실은 너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넌 어떤 사람이라고? 너와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그때마다 나는 우물쭈물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요. 저도 참 답답합니다! 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4.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들일 줄 아는 사람. 계속 부딪혀보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적어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니다. 당분간은 잘 모르겠다고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진짜로 잘 모르겠는 건 모르겠다고 이야기해야지. 확신은 아직 나에게 너무 먼 이야기이다.




+ 쓰다 보니 너무 암울해졌지만 나는 분명히 나만의 행복과 평안을 꼭 찾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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