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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Jan 14. 2019

배떼지가 부르니 채식 운운하지!

식단의 변화, 세대의 변화.

K는 갈비찜을 앞에 두고 젓가락을 허공에 뒤적이며 밥상 위에 올라온 이 가엾은 목숨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디서 온 소일까, 어떻게 살았을까, 죽음 앞에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주사를 맞아야 했을까. K는 머릿속이 갈비찜처럼 폭삭 익는 느낌이었다. 그 갈색 고기 덩이와 섞인 밤도 당근도 집고 싶지 않았다. 곁가지 반찬으로 손을 옮기려는 찰나, 할아버지가 K에게 소리쳤다.


배떼지가 불러 터지니 채식 운운하지!
   밥상머리서 뭐하는 짓이야?

K의 할아버지는 산 지옥이었던 6.25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고극하게 빈곤했던 날들을 버텨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이유였다. 그의 젊은 날엔 상 위에 밥이 오르면 행복한 날이었고 고기가 오르면 잔치인 날이었다. 혹독했던 세월을 거쳐 풍족하게 먹는 요즘이 그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자신의 부모는 먹어 보지도 못한 산해진미를 즐기는 자신의 노년이 어렵게 살아온 대가이고 수확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런데 가족 모두 단란하게 둘러앉은 저녁 식탁에서 자신의 손녀 K가 자신은 이제부터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입매는 단단했다. 마치 인생의 유일한 길을 찾은 듯, 어린 K는 단호하고 당당했다. K의 할아버지는 손녀의 그런 패기 어린 선포가 못마땅했다. 삶이 힘든 것도 모르고 굶주림이 뭔지도 모르고 산 이 핏덩이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니 참 배가 불렀구나. 불러도 너무 불렀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벌건 눈과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할아버지를 K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이미 직감한 터였다. 최대한 그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나물 반찬을 주워 담아 자신의 밥그릇에 소복이 올려 꾸역꾸역 울먹이며 먹었다. 이래저래 할아버지 편을 들며 한 마디씩 거드는 삼촌들과 눈치 주는 엄마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잔뜩 내린 채, 누구도 자신과 동물의 고통을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 이 식탁이 무인도처럼 느껴졌다.


사실 우리는 배떼지가 부른 것이 맞다.  70년 전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음식으로, 심지어 영양제로 쉽게 섭취할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만 하더라도 극도로 빈곤한 시절은 대체로 겪어보지 못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음식은 선호이고 선택의 대상이다. 어떤 음식점을 가고 무슨 재료를 먹을지가 연인과 친구의 만남에 전제 조건이며 어느 곳이던 편의점이나 길거리 가판대에 들러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다.


배곯은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끝없는 선택지를 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식량을 찾아 헤매지 않는 에너지로 생각을 하고, 읽고, 보고, (지금의 나처럼) 글을 쓴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옆 동네 아무개의 불행부터 먼 나라 아이의 비극까지 알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채식주의는, 특히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유의 채식은 그 영역이 조금 더 넓어진 것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이 아닌 짐승의 목숨까지 고민하고 동정하는 넉넉함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우리 인식의 변화와 확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해오던 대로, 인간답게 사고하는 것뿐이다. 현대 채식주의의 시작이 미국과 유럽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먼저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우리에게로 전달되는 것 역시 당연히 순차적일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가 우리나라에 자리 잡히는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 식단의 변화가 다른 형태의 갈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젊은 우리가 K처럼 동물을 귀여워하고 아끼고 목숨만큼 애정 하는 그 마음을 다른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옛 세대가 동물과 생선을 먹는 그 풍요로운 기쁨을 우리 세대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그들과 우리 중 누군가가 부족하거나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다른 시간과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의 다름을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존중하는 자세로 식단과 세대 안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찾으려 해야 한다.


한 때 유행을 따르듯 혹은 찰나의 열기에 서툴게 내린 결정인 것처럼 채식주의자를 대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모든 동물이 고통받지 않기를, 지구가 오염되지 않기를, 그리고 스스로 건강하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으로 노력한다. (왜 사람들은 비건이 되기로 결심하는가? 에 대한 저의 글) K가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생활에 변화를 주는 것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왜 그런 결심을 내렸는지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채식주의자에겐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한 사람을 야만인이나 무지몰각하다고 여기는 것도 안된다. 앞서 말했듯이 채식주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확장된 개념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산 우리가 하나의 신념만으로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식단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내가 이것을 먹고 그가 저것을 먹는다고 그와 내가 다른 종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채식을 하는 것을 고귀하게 여기고 잡식을 하는 것을 몽매하다 하는 것은 같은 인간 사이에 또 다른 단절을 낳을 뿐이다.


배떼지가 불러 채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의 풍요로움에 고마워하고 서로 다른 식단의 다양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썼다. 채식주의자가 늘어나는 요즘 조금 더 유연한 눈빛이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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