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공대, 경영대, 학부만 10년째 다니는 30년 묵은 화석의 일기
한때 "Generalist 가 돼라!"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비슷한 말로, "지금은 융합의 시대", "멀티형 인재로 거듭나라", Connecting the dots" 등이 있다.
매 순간 톡톡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한가지 일에는 집중을 못하지만 순간 집중력이 좋고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나에게는 자존감을 세워주는 굉장히 달콤한 말이었고 내가 가야할 길을 비춰주는 빛이라고 여겼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이 박사학위를 따고, MBA를 마치고,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필자는 지금까지 전공을 3번이나 갈아치우며(?) 대학만 10년째 다니고 있다.
경영학 (기술경영학)
재료공학 (신소재공학)
화학공학 (생명화학공학) - 부전공
의학 (General Practice) - 재학중
그렇게 학부에서만 4개 전공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 300학점 가까이 이수하였다. 뭐하러...?
박사까지 공부만 한 사람들은 "나는 가방끈만 길다" 라고 자학하지만 나는 "짧디 짧은 가방끈만 많다..."
이 글은 언젠가 Connecting the dots 할 날을 고대하며 융합의 시대를 맞아 멀티형 인재로 거듭나기 위해 Generalist가 되기를 선택한 "스탯 잘못 찍은 망캐/잡캐 (망한캐릭터 또는 잡종캐릭터)"가 지금까지 어떤 공부를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기초과학 (물/화/생/수)
우선, 지금까지 들었던 과목을 나열해보려고 한다. 물리/화학/수리과학/생명과학과에서 수강한 과목은 1-2학년 때 듣는 기초과목들과 교양과목들이다. 의대에서는 예과때 듣는 과목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필자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뭔가 이름이 좋아서 신소재공학, 화학공학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에 화공/소재 분야의 기본이 되는 물리학, 수학 위주로 기초 수업을 들었다.
교양과목
교양 필수 과목으로는 영어, 공학적설계&디자인, 프로그래밍, 논리적글쓰기를 공부했는데 공학적설계 과목에서는 CAD를 이용해서 제품을 디자인하여 3D프린터를 이용해 출력하거나 직접 작업실에서 썰고 깎는 작업을 배웠다. 프로그래밍 시간에는 파이썬을 배웠고(?) 논리적 글쓰기 시간에는 논문쓰는 기술을 연습했다. 그리고 중국에도 관심이 많아서 KAIST에서 제공하는 수업 중 중국에 관련된 수업은 모두 수강하였고 방학마다 칭화대학교, 북경대학교, 홍콩과기대학교, 싱가폴국립대학교, 싱가폴 난양공과대학교, 천진중의대학교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상하이교통대학교로 교환학생을 다녀올 예정이다. 비록 전공은 하지 않았지만 중국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경영학
경영학은 크게 경제, 재무회계, 마케팅, 인사조직, 경영전략, 경영정보, 생산관리, 스타트업 등으로 세부전공을 나눌 수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마련한 경제학,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공부하는 인사조직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인사조직 과목(심리학, 조직행동론, 인적자원관리)에서는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나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끌어 모을 수 있는지, 조직을 운영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개인성과를 어떻게 관리하고 보상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학습했다. 주로 숫자를 쳐다보는 경제학과 달리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관리하는 인사조직 수업에 매료되면서 경영대학원에 지원할 때에는 인사조직(세부전공:혁신조직관리) 분야로 지원했다. 결국 카투사에 합격해 군대를 가야 했지만...
신소재공학
KAIST에 있을 때 필자의 주전공은 신소재공학이었다. 원래는 화학공학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방학동안 신소재공학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다가 물질의 특성을 공부하여 필요에 따라 적합한 재료를 설계하거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신소재공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되어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신소재공학과에서는 "물질/재료"의 열역학적 특성, 전기/자기적특성, 기계적특성, 양자화학적 특성, 조직학적 특성 등을 공부하고 XRD, SEM, TEM, AFM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서 물질의 특성을 해석하는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산업에서 쓰일 고분자, 금속, 바이오소재 등을 설계하는 과정을 연습한다.
갑자기 딴소리지만 한때는 "전.화.기." 라고 불릴만큼 전기전자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가 제일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컴퓨터공학과의 주가가 치솟았고 신소재공학의 인기도 많이 높아졌다. 필자가 공부했던 전공의 인기(?)가 좋아진다니 나에겐 반길만한 일이다. 역시 세월이 흐르면 강산도 변하나보다.
생명화학공학
고등학생 시절 어린마음에 공부하고자 했던 생명화학공학은 총 21학점을 수강하고 부전공으로 마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명화학공학을 공부하려고 했던 이유가 "생명" "화학" "공학(물리, 어릴때는 공학이 물리학인줄 알았다)" 이라는 온갖 묘사가 섞여 있어서 어릴때부터 잡캐를 지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생명화학공학은 다양한 학문분야를 잡다하게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공정을 설계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학습과정 내내 수학문제를 굉장히 많이 풀어야 했다. 화장품, 석유제품, 제약 등 각종 물질을 대량생산 하기 위해서는 공장을 돌려야 하는데 화학공학의 핵심은 바로 그 공장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다. 예를들어 맥주를 제조하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것, 해열제를 대량 생산하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것, 환경오염물질을 처리하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것, 원유를 분리해서 각종 물질과 석유를 생산하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것 등은 모두 화학공학의 분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잡캐가 되고 싶었는데 공장 파이프라인 설계 전문가가 되어가는 내 자신이 싫어서 결국에는 다양한 물질의 특성에 대해 두루 섭렵하는 신소재공학으로 전과하게 되었다.
의학
의학과에서는 공부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없고 그냥 의학의 전분야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학습하게 된다. 졸업하고 수련의(인턴)과정을 밟게 되면 학부때 배웠던 지식을 실전에서 활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게 될 것이고 전공의(레지던트)과정을 밟게 되면 특정분야 (예를들어 여러 계통 중에서 소화기계통,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과 또는 외과)를 파고들며 공부하고 실전경험을 쌓게 된다. 아니면 일반의(GP)로 개원하거나 가정의학과(FM) 전문의가 되어 잡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나는 당연히 잡캐가 되고싶다.
지금은 의대에서 다음과 같은 과목들을 공부하고 있는데 과목수가 굉장히 많지만 1-2학점 짜리 과목도 많아서 과목수에 비해 로드가 그렇게까지 헤비하지는 않다. 물론, 대학교 10학년에게도 시험기간은 여전히 힘들다... 교수님들도 데려다놓고 매주 시험을 보게 하면 굉장히 힘들어하실 것이 분명하다. 내 손모가지를 건다.
내가 대학교에서 선형대수학을 배울 때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우고 있었을 (물론 연대의대에 진학할 만큼 뛰어난 학업성취도를 유지하기 위해 선행학습을 했다면 초등학생때 벌써 미적분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동기들과 나란히 앉아서 똑같은 교과서를 보며 낑낑거리면서 수업을 듣고 허덕거리면서 시험을 보다보면 나이차이를 새까맣게 잊게 된다. 나도 나름대로의 전문성이 있고 나만 겪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다른 동기들도 각자 자신만의 경험이 있고 분야에 따라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훌륭한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러다보니 저 높은 강단에 서 계신 저분들 (교수, 국회의원, 의사, 변호사, 선생님 등)과 나도 한끝 차이일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쓰다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또 이렇게 두서 없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의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잡캐도 전문성이 있다는 것이다. 잡캐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갖는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온 세상의 논문을 다 검색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잡캐들의 주요 능력인 포괄적인 전문성의 주가는 분명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잡캐의 주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나는 잡캐로 살 것이다. 잡캐로 살면 포용력을 가지고 세상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어서 얼마나 재밌는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거다 :)
앞으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다양한 전공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점들에 대해서 일기를 써나갈 것이다. 그리고 각 분야 사람들의 가치관을 비교해보며 전문가들끼리 소통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당신이 의학전문가, 공학전문가, 경영학전문가라면 나는 잡학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