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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성 식물에 대한 심심한 위로

세뇌의 기술 스물세 번째 이야기

by 애들 빙자 여행러

사실 이번 제주행은 매우 부담스러운 행보였다.

6월쯤 제주 공간을 오픈하고 자연과 함께 살겠다고 100여 평은 넘는 앞마당을 그냥 방치(?)를 했더니 공간을 방문한 사람들로부터 마치 밤에는 ‘흉가’ 같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멋있지는 않아? 그게 바로 자연스러움인데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무섭다는 의견에 뭔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사람을 쓸까 하다가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장비를 살까 하다가 나의 노동의 스킬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부인에게 이번 긴 추석 연휴에 내가 해결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러니 제주행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풀 깎는 ‘예초기’를 질러버렸는데.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하나 버리는 셈치고 가격 부담이 덜한 가볍고 사용이 편리한 충전식 제품을 제주로 배송시켰다.


제품 설명서는 엉터리였다. 자세하지 않았고 동영상을 찾아봐도 칼날을 어떻게 끼우는지 세밀하게 나온 것이 없었다. 사고의 위험성이 걱정되어 금속날보다는 줄로 깎는 안전한 날을 끼워보았다. 일주일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해보겠다고 했지만 이걸 과연 다 할 수 있는 규모인지 궁금하긴 했다.


날이 밝자 새벽부터 움직였다. 잠이 일찍 깨기도 했지만 제주의 햇살은 너무나 강렬해서 새벽부터 움직이는 것이 좋다. 앞쪽 앞마당에서 첫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줄날은 헛돌기만 할 뿐 제대로 깎여지지가 않았다. 이미 바닥에 굵은 넝쿨이 가득하여 이걸 제거하지 않고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듯했다. 즉, 줄날은 일반 잔디용이지 이런 야생의 잡초와 넝쿨은 작동하지 않았다.


사냥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낫을 들고 넝쿨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런 잔인함이 있었던가. 이건 학살이었다. 보이는 대로 녀석들을 베고 있었다. 울분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이 정도는 너무한 것 아니냐고. 같이 살고 싶었다고. 하지만 너희는 선을 넘었다고. 그렇게 보이는 대로 살육이 아닌 살초가 시작됐다.


피냄새가 아닌 잡초들의 그 짓눌린듯한 풀냄새가 진동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원래는 담장이나 건물에 넝쿨이 오르면 멋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건축가 선생님은 "건물이 망가지는 지름길"이라 했다. 철저하게 넝쿨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예쁜 돌담에도 넝쿨이 한가득이었다. 돌담틈사이로 넝쿨이 드리우면서 돌담이 무너지고 약해지고 있었다. 이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뜯고 잘라야 했다. 너무해 너희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3시간이 지나니 나의 몸은 녹초가 되고 손이 예초기 진동에 떨리기 시작했다. 1차전은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내일부터 2차전이다.


시리즈 2차전부터 요령이 생겼다

이제 나는 다른 어떤 것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이번 전투의 승리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강도 높은 노동으로 아침에 영향이 있을까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잠을 일찍 들어 푹 잤더니 다시 시작할만했다. 약 일주일간 7차전이 열릴 것이다. 1차전은 서로 탐색전이었다.


2차전도 새벽에 눈이 번뜩 떠졌다. 오늘은 우선 입구에서 들어오는 약 30여 미터 길가를 침범한 넝쿨 무리들과의 대전이었다. 먼저 낫으로 굵은 넝쿨을 공략하고 마무리로 예초기를 투입할 전략이다.


초반부터 선취점을 허용했다. 녀석들의 수준이 낫으로 손쉽게 자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여러 겹으로 쌓여 아주 단단하게 엉켜있었다. 얼마나 엉켜있던지 손으로 들어 올리면 모두 따라 올라올 정도. 자세가 낮으니 허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손목도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자, 이제 좀 이르지만 예초기를 마무리로 투입한다. 예초기의 줄날을 금속인 이도날로 바꿨다. 이제 실전이다. 보호장비를 갖추고 녀석들 앞에 섰다. 이제부터 대역전극이 시작될 것이다.


노량해전? 아니 제주마당전!

다시 다음날이 밝았다. 오로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6시 정도가 되면 사물을 구별할 정도의 밝기다. 이제 탐색전은 없다. 전면전이다. 오늘은 돌담이나 입구가 아닌 앞마당 적의 본진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학익진이요. 이것은 마치 임진왜란의 마지막 승부처인 노량해전이 될 것이다. 앞마당 교두보를 확보하여 퇴진하는 적들을 무참하게 정리할 것이다. 2개의 풀 충전된 배터리를 허리에 차고 이도날을 장착하고 긴 장화를 신고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적들은 전의가 상실된 것 같았다. 어제까지 적들의 진지에 폭격을 가한 공간은 벌써부터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생명의 의지를 상실한 듯 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가볍게 낫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생명이 꺼져가듯 혈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이팟에 전투의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진격이다. 이도날이 스치고 지나는 곳마다 승리의 함성이 들렸다. 그들은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제 요령이 생겨 기술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수평으로 지나기보다 각을 져서 자르면 훨씬 더 강력한 힘이 들어갔다. 군데군데 굵고 뿌리가 깊은 잡초 나무가 자리 잡아 있을 땐 후퇴하기도 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시작했고 나의 온몸은 땀으로 적셔졌다.


잡초 속에 숨어있던 각종 벌레들도 도망치고 날아오르기 여념이 없었다. 그들도 패배를 인정한 것 같았다. 다시 3시간의 무자비한 전투가 끝날 때쯤 앞마당은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들은 담 쪽으로만 남아숨을 죽이고 있었다. 준비했던 2개의 배터리가 바닥이 났다. 나머지 적들의 소탕은 내일로 미뤄야겠다. 기대했던 제주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지 않을 것 같다.


비로소 내속에 숨어있던 야생의 본능을 찾아서 기분이 좋냐고?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식물들의 나약함에 너무 애처로웠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단, 하루 만에 상처 난 식물들은 삶의 의지를 잃고 뜨거운 태양아래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무언가 허탈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마당은 나의 통제하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자연과 계속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 마당에 반딧불이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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