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콩 Oct 24. 2024

영하 60도를 견디는 펭귄처럼 서로를 안았어(1)

허들링(Hudding)과 <5가지 사랑의 언어>

[2부. 타협과 분노]


D+9

허들링(Hudding)이란, 알을 품은 황제펭귄들이 가까이 모여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체온으로 영하 60도에 이르는 혹한의 추위를 견디는 방법이다. 무리 전체가 돌면서 바깥쪽과 안쪽에 있는 펭귄들이 계속해서 서로의 위치를 바꾼다. 바깥쪽에 있는 펭귄들의 체온이 떨어질 때 위치를 교대하며 한겨울의 추위를 함께 극복한다.


  결혼과 이혼이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듯 오랜 연애 또한 끝이 났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절차가 필요했다. 내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한 사람은 경조사를 함께하는 모임인 자칭 ‘육공주’에 속한 오랜 친구 윤햇살이었다. 사실 ‘이야기를 했다’는 점잖은 표현이 민망하다.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크게 오열했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햇살이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앞뒤 설명 없이 흐느끼는 목소리에 얼마나 놀랐을지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햇살은 나의 마음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헤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붙잡고 싶은데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친구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라고 했다. 네가 다시 전화해서 붙잡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동안 너에게서 들은 대로라면 그 사람은 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거야. 정말 그럴까. 자신이 없었지만 햇살이 용기를 주었다. 물론 지금 너를 속상하게 해서 야속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을 해. 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힘없이 전화를 끊었지만 차분한 조언을 듣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의 마음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고,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카페와 정류장에서의 대화를 끝으로 공식적인 이별 의식을 마무리했다. 콘서트가 끝난 뒤에도 객석의 후끈한 열기가 가시지 않는 것처럼, 후유증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만 하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됐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앵콜 한 곡 없이 매정하게 꺼져버린 무대를 한없이 바라보며 콘서트장을 떠나지 못하는 팬처럼 나는 그날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는 내가 많이 걱정되었는지 자주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했다. 초여름이었지만 태양이 이미 한껏 내리쬐고 있어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땀과 눈물을 함께 말리다 보면 휴대폰이 울렸다. 햇살은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여러 장 읽어주었다. 스피커폰으로 햇살의 잔잔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여기는 너른 들판이고, 지금은 햇볕 좋은 곳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평안한 상태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다.

연인 간의 헤어짐도 죽음과 비슷하대. 보고 싶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건 똑같으니까. 3일장, 49제 치르듯이 애도의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대. 네가 지금 이렇게 힘든 것도 자연스러운 상태인 거야. 그치만 마음이 너무 아파서 쪼개질 것 같다는 말 들으니까 나도 많이 속상하더라. 언제든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자. 최대한 자 보려고 노력하고.”

“이별 후에도 금단 증상이 나타난다. 이별 뒤 따라오는 질문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보통 금단 증상이 만드는 질문은 ‘질문을 위한 질문’이며 참을성이 없다.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괴로운 감정을 무마하려고 의문을 남발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반드시 한 번에 하나씩 질문해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풀기 힘든 질문을 연거푸 던지면 울음을 터뜨리듯,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자신에게 마구잡이 질문을 하는 행위는 좌절과 혼란만 야기한다. 혼란이 가중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무기력에 빠진다.”

“회복은 곡선형 그래프다.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 회복 과정은 늘 오르락내리락한다. 반응이 더디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햇살이 나에게 해준 위로와 조언은 그 어떤 고맙다는 말로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연애 초반에 나누었던 고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도록 우리는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방법, 애정의 크기, 스킨십 속도 등을 맞춰가는 것에 무척 서툴렀다. 이슈를 발생시킨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 여기저기서 찾은 정보들을 서로 공유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햇살은 그때도 주로 책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나에게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빌려주었다. 우리 사이에서 유행이 된 이 책은 각자의 연애에 기준선이 되어 2024년에도 빛을 발했다. 책에 언급된 5가지는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 햇살은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나는 자꾸 예전에 좋았던 일들이 떠오른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원래 바닥을 찍어야 다시 올라오는 법이니 쌓인 말들을 마음껏 표출하라고 했다.

  인정하는 말. 이별 직전 통화에서 모진 말을 듣고 깊은 상처를 입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에게 학교 이야기를 하면 국어 교사로서의 나를 항상 존중하고 칭찬해 줬다. 처음으로 담임을 맡고 실수투성이가 되어 주눅 든 나에게 자기도 처음 취직했을 때 그랬다며 최선을 다해 두둔해 주었다. 그랬기에 그의 마지막 말들이 더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한 번 따듯한 모습을 보이면 색다른 면이 있다며 긍정적으로 재평가받지만, 상냥하고 부드럽던 사람이 한 번 차갑게 굴면 사실 다 가식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하는 시간.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나 데이트를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나는 임용 공부를 하겠다고 스터디 카페에 박혀 있었고 그는 취직을 했다. 멀리 놀러 나가지 못하더라도 동네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 한 번, 그가 좋아하는 메뉴 한 번 번갈아가며 근처 식당을 하나하나 열심히 정복해 나갔다. 둘 다 일을 할 때에도 가끔 일정에 치여 오늘은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하던 건 늘 나였다. 그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한 곳, 먹고 싶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모든 걸 같이 해주었다.

  선물. 내 첫 명품은 그가 생일 선물로 준 검은색 프라다 반지갑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복닥거리다 기운이 쭉 빠질 때 교무실 책상에 앉아 지갑을 꺼내 가죽에 세로로 잡힌 정교한 주름들을 쓰다듬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가 준 에어팟 프로는 헤어지고 몇 달 뒤 잃어버렸다. 늘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며 동선이 단순한 삶을 살았는데 하필이면 서비스센터에 갈 일이 있어 다른 지역에 다녀온 날 딱 분실하고 말았다. 에어팟을 잃어버린 날은 그와 헤어졌던 날처럼 정말 서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일상 속에서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영상을 볼 때마다 매번 애도하는 마음이 드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건네준 선물 보따리도 아직도 생생하다. 체리 식초,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트러플 소금, 히말라야 소금, 레몬 사탕, 초콜릿… 지난 방학 때 동료 선생님과 베트남에 일주일 동안 다녀왔는데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귀국하는 날, 짐을 싸며 여행지에서 선물을 잔뜩 가져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닫히지 않는 캐리어를 온몸으로 누르고 간신히 지퍼를 잠그며 그는 어떻게 그 많은 선물을 한국까지 무사히 가져왔던 건지 비법이 궁금했다. 귀국할 때의 수하물 무게가 곧 사랑의 무게였다는 것을, 그만큼 그가 나를 무겁게 사랑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봉사. 그는 이삿날 새벽부터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짐을 날라주고 주말 내내 이삿짐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주로 동네에서 만나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평소에도 데이트 후에 늘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다음날 출근이라 빨리 집에 들어갔으면 해서 내가 그의 집 앞까지 가면 더 걷고 싶다며 다시 중간 지점까지 함께 돌아오곤 했다.

  스킨십. 늘 잡고 있던 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애인이 아닌 다른 이와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독립한 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다정하고 따듯한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꼈다. 밤이 되면 기도할 때처럼 양손을 가만히 포개 잡고 잠들려고 노력했다.  

  차라리 그가 아주 나쁘고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마음껏 원망할 수 있었으면 지금보다는 덜 슬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별 후에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는지 처절하게 느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그는 망설이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나보고 괜찮으면 계속 이어가면 되는 거고, 별로면 그때 가서 정리하면 되지. 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선택을 하든 너를 1순위에 뒀으면 좋겠어. 나도 그럴 테니까.’ 그는 항상 선택을 해야 할 때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선택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게 무언가 망설여질 때 '자기 전에 계속 생각나고 후회할지 생각해 보고, 그 정도가 아니면 멈추고 그럴 것 같으면 실행하라'고도 말해주었다.

  이렇게 신중한 사람이 이별을 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이토록 좋은 사람이 떠나갈 정도로 나는 엉망진창이구나. 이미 끝나버린 그의 사랑이 피부에 와닿게 생생히 느껴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점점 부서졌다. 내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더 예뻤다면. 내가 더 성격이 좋았다면. 내가 정교사였다면.

  햇살은 <사랑 수업>에서 언급된 안 좋은 예시란 예시는 다 따라 하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여겼다.

“헤어진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좋았다면 ‘한때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지’‘참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 정도로 생각하자. 원래 선물이란 게 받을 때 잠깐 좋고 곧 무덤덤해지지 않던가. 그 사람과 평생 함께 행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선물이 아닌 건 아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가졌던 건 분명 큰 축복이다. 그 시간을 고마워하는 마음은 정신 건강에도 좋다.”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 오랜 시간 옆에 있었던 거야. 너는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사랑 수업>, 윤홍균, 심플라이프, 2020

<5가지 사랑의 언어>, 게리 채프먼, 생명의말씀, 2010)

이전 05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