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길었던 일주일이 지났다. 약속 장소를 잡기 위해 안녕.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 하고 카톡을 보내자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내가 먼저 시간을 가지자고 했으면서 그 말을 내뱉은 입을 퍽퍽 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지나치게 빠른 답장을 보자 허무함이 밀려왔다. 손에 깁스를 한 것도 아니고, 양쪽 눈에 다래끼가 나서 안대를 한 것도 아니고, 수능 시험지를 포장하는 아르바이트에 지원해 휴대폰을 제출한 채 노동에만 매달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쉬운 일을 하지 않았구나. 만나기도 전에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것 같았지만 구질구질하더라도 끝까지 매달려보기로 했다. 나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훗날 이때를 되돌아봤을 때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그가 잡혀주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으니까. 아니, 그런데 만약 그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이번 주 내내 그런 것처럼 앞으로 평생 동안 만날 일도 전화할 일도 없이 이렇게 각자 살아가는 거라고? 며칠 전까지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갑자기 같은 라인에 사는 이웃보다도 더 먼 사이가 되는 거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지난주 토요일, 이 통화가 연애에 종말을 고하는 종소리임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베개로 배를 받치고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폭탄 발언을 듣고 난 후 침대 위에 눕기만 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댔다. 침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불을 깔고 담요를 덮은 채 잠을 청하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딱딱한 바닥에서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서러워해야 하나. 억울했다.
우리 오늘은 다정한 가면을 벗고 서로 솔직해져 보자.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줄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국가대표들이 쓴다는 단백질 쉐이커 겸용 텀블러, 구글에서 만들었다는 타이머, 삼성 무선 이어폰이 덩그러니 담겨있었다. 나름 준비했는데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종이 포장지를 밑에 깔고 작은 조명을 칭칭 감았다. 리본으로 동여맨 선물 상자와 케이크를 들고 그에게로 향했다.
100분 토론에 참여하기라도 하듯 비장한 마음으로 접선지에 도착했다. 늘 그랬듯이 카페에는 그가 먼저 들어가 앉아있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카운터에 가 주문을 하는데 수백 번은 반복해 온 이 행위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늘 그랬듯이 그는 아이스 라떼, 나는 따듯한 차를 주문했다. 다행히 그곳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잘 지냈어?”
“아니.”
“미안.”
선물을 건넸다.
“다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네. 고마워.”
“케이크 주문제작 했어. 앞자리 바뀌는 거 적응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랬지.”
차를 마셨다.
“여기 생일 축하 카드.”
생일 축하해요.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고마운 것들이 참 많아요.
나를 늘 기다려줬던 것.
슬플 때 다정하게 위로해 줬던 것.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
부족한 점이 많은 나를 오랜 시간 사랑해 줬던 것.
잊지 못할 거예요.
앞으로 당신의 인생에 행복한 날들만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카드를 읽고 나서 그는 한참 동안 눈을 내리깐 채 말이 없었다.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예쁜 카드 주고 싶어서 열심히 검색했어. 옆에 투명한 손잡이 잡아당기면 생일축하 멜로디가 나와. 이 버튼 누르면 LED 불빛도 켜지고. 여기 HAPPY BIRTHDAY 글자는 내가 색연필로 한 개씩 색칠했어. 잘했지?”
“응. 예쁘다.”
그가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은 정했어?”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힘들게 입을 뗐다.
“미안해.”
“그래. 그동안 틀린 적이 없으니까 오빠가 한 선택이 맞겠지.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
“마지막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왜 키스하자고 했어? 내가 피곤하다고 거절했더니 속상해했잖아. 그래서 난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
그는 다시 한 번 머뭇댔다. 그래. 대답 잘해야 할 거야. 지금 하는 한 마디로 5년 동안 지켜온 이미지가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으니.
“다시 사랑하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잘 안되더라.”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는 나에게 먼저 일어나라고 했다. 가방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없이 카페 문을 바라보니 그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나왔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겠구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구나.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랬듯이 신호음이 한 번 제대로 가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면 안 될까?”
“알겠어. 집에 짐 내려놓고 바로 갈게.”
그리고 몇 분 뒤 그가 돌아왔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을 잊어버렸어?”
“응.”
거짓말이었다. 그곳은 내가 28년 동안 살았던 동네였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고 걸었다. 신호등이 계속 빨간불이었으면 좋겠다. 버스 정류장이 아주 먼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버스가 한참 뒤에 왔으면 좋겠다. 이대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오늘따라 신호가 금방 바뀌었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늘 차고지에 있던 버스가 운명의 장난처럼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계속 울자 그가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는 어쩐지 애정보다는 격려와 염려가 담겨있었다. 마치 먼 곳으로 떠나는 전우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았다.
버스에 올라타 교통카드를 찍고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뒤돌아서 가고 있었다. 어째서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걸까. 미련은 내가 지나온 자리에만 뚝뚝 흘러넘쳐 질척이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고 담백하고 깔끔하게 마치 온 적이 없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언제 밤이 되었는지 차창 밖이 깜깜했다. 버스가 덜컹거리는 대로 몸을 맡기고 창 밖 불빛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며
그대의 커다란 웃음 속에 나 그저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1987)
이문세 씨의 사랑이 지나가면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지나가도 걱정하지 마세요. 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옵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로 디제이가 곡 소개를 마쳤다. 나는 혼자 되뇌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남겨진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가버린 사랑을 붙잡을 방법이 있을까요. 아무렇지 않게 기억을 지워버리고 괜찮은 척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영원히 옛사랑을 그리워하게 되면 어떡하나요. 새로운 사랑이 오기는 할까요. 새로운 사랑을 붙잡을 용기가 더는 남아있지 않으면 어떡하나요. 새로운 사랑도 곧 옛사랑이 되어 떠나가면 어떻게 하나요. 이렇게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만 하는데 사랑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한참 뒤에 가사를 찾아보니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였다. 그때는 왜 '커다란 웃음'으로 들렸는지 모르겠다. 무사히 나를 떠나보낸 그가 후련해 보여서였을까.
나는 무지하게도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오랜 시간 착각했다. 연애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서로 사소한 단점까지 모두 이해하고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상대방이 그저 참고 있다는 걸 몰랐던 거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좋아했다.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규칙적이고 착실하게 철도 위를 달려가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조립된 손수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 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었으나 이제는 갈림길에 도달해버렸고, 내가 덜컹거리며 바퀴가 빠지도록 쫓아가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아주 멀리 떠나갔다.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올려다본 하늘엔 뿌옇게 번진 그믐달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시공사, 2014)
https://youtu.be/cOq-vCErjIU?si=ReP76UP06_uGAp1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