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눈물>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MBC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남극에 겨울이 찾아오면 황제펭귄 수컷은 암컷이 사냥을 나간 동안 알을 품는다. 매서운 눈보라가 치면 펭귄들은 몸을 꼭 붙이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버틴다. 온기를 나누며 길고 어두운 남극의 흑야가 지나가기를 참고 기다리면 어느새 알이 부화하고 귀여운 새끼 펭귄이 탄생한다. 새끼 펭귄들은 어느 정도 자라면 자기들끼리 모여 동그란 원을 만든다. 귀엽고 작은 흰색 원과 두텁고 커다란 회색 원이 합쳐지며 거대한 펭귄 군락을 이룬다. 거대한 펭귄 동그라미는 멈추는 일 없이 계속 돌고 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서로를 끝없이 품는다.
“얘들아! 우리 허들링 하자.”
영상을 본 뒤로 우리들은 날이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허들링을 하자고 외쳤다.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뒤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가운데로 숙여 정수리를 모으고 발을 내려다보는 것이 규칙이었다.
“너 정수리가 왜 이렇게 따듯하니? 넌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하얗게 질린 것 봐.”
“얘는 원래 피부가 하얀 거야.”
“거의 눈사람 아니야?”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듯하고, 손이 따듯하면 마음이 차갑대.”
“그럼 넌 정말 마음이 뜨거운 아이구나. 너무 뜨거워서 데일 뻔했어!”
“고마워. 네 손 정말 따듯하다. 좀 잡고 있을래.”
펭귄들처럼 함께 모여 종알대다 보면 성적표 속 등급, 작성해야 하는 자소서, 엄마와 싸운 일, 대학 같은 것들이 잠시 동안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각자 다른 대학에 가면서 사이가 소원해졌지만 힘들고 외로운 날이면 종종 함께 허들링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또 몇 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한창 방황하던 무렵에 우리는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산다는 공통점으로 다시 뭉칠 수 있었다. 동네 구립 도서관에서, 집 앞 공원에서,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우리는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회전 초밥 같다고 웃었던 그 시절처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어느덧 삼십 대를 코앞에 두고 이제는 경조사를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단톡방이 있다. 윤햇살은 ‘공주님들’, 임시주는 ‘바쁜잉여들’, 임풀잎과 조이불은 ‘뽀시래기’, 서다람은 ‘하트칭구들병아리스마일’, 나는 ‘보석함’이라 저장한 톡방이었다. 평소였다면 나의 이별 소식은 보석함에 빠르게 공유됐을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이 공무원 시험을 앞뒀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다들 연애 기간이 1년이 넘어서며 장기화되거나 연애를 한지 오래되어서 오랜만에 나타난 새로운 뉴스가 특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를 해버리면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 쐐기를 박는 것이라는 사실도 두려웠다.
하지만 몇 주 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시험이 끝나면 다 같이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헤어졌다고 담담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애써 꼭꼭 눌러 놓았던 슬픔이 다시 터져 나오고 말 것이다. 다 같이 모여 즐거운 자리를 축축 쳐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드디어 메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좋은콩: 얘들아, 나 헤어졌어. 그동안 열심히 연애상담 해주고 조언도 많이 해줘서 고마워!
시주랑 풀잎이 시험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인사시켜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ㅎㅎ
서다람: 헐???!! 이게 무슨 일이야!!!
임시주: 헉… 끝나고 만나자ㅜㅜ
임풀잎: 흐엉ㅠㅠ 시험이 얼마 안 남아가지고ㅠㅠ 바로 달려갔을 텐데!!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줘.
윤햇살: 우리가 항상 옆에 있어… 이별을 잘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ㅠㅠ
조이불: 맞아ㅠㅠ 그래도 너무 대견하다!! 연애하느라 고생 많았어!!
마음 잘 추스르고 힘들 때 전화해.
풀잎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나는 네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어. 엄청 성숙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싸운 적도 거의 없고. 평소에 메세지 보낼 때 서로 존댓말 쓴다고 해서 엄청 놀랐었어. 너희 커플 벤치마킹해서 나도 남친이랑 존댓말 써보기로 한 적 있거든? 우린 동갑이라 그런지 바로 실패했어.”
“안 싸우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차라리 많이 싸울 걸 그랬어. 그 사람이 나한테 이만큼 해주니까 여기서 더 요구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어. 그 사람도 별 말 없던 게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포기해서 그런 거였더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서로 더 솔직해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속상하겠다.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리 곧 만나자.”
이불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나도 겪어봐서 알아. 당장은 진짜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난 그때 공부에 온 정신을 쏟았어. 꼭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고 싶었거든. 그 사람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만 했더니 괜찮아졌어. 너도 금방 괜찮아질 거야. 늘 응원하는 거 알지?”
MBTI가 INFP인 다람에게도 연락이 왔다.
“괜찮아? 우리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자. 저번에 우리 맛있게 먹었던 데 또 가자. 네 기분이 괜찮아질 때까지 떡볶이 먹어도 돼! 너랑 함께라면 맨날 떡볶이만 먹어도 좋아.”
시주는 시험이 끝나면 내가 전부터 만들고 싶어 했던 그림책 작업을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무엇이든지 말만 하라고, 언제든지 협력해 줄 수 있다는 말이 무척 든든했다.
모태신앙으로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햇살은 찬양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빛이 없는 내 삶에 찾아오신 주의 빛이 내 삶을 비추어갈 때 생명이 되네.’
내가 힘들 때 자주 들었던 찬양이야. 슬프고 지칠수록 마음을 밝게 하려고 노력해야 또 살아갈 수 있더라.
우리 서로를 따듯하게 비춰주자.”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오랜만에 허들링 장면이 다시 보고 싶어져 유튜브에 ‘황제펭귄’을 검색했다. 2019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업로드한 영상이 알고리즘에 떴다. 제목은 ‘새끼 황제펭귄들을 덮친 남극 폭풍’이었다.
부모 펭귄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도 새끼 펭귄의 생존율은 6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한 속 폭풍우가 한바탕 지나간 다음 펭귄 군락 근처에는 얼어 죽은 새끼 펭귄들의 사체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회색 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펭귄 한 마리가 죽은 새끼 펭귄의 머리 위에 가만히 가슴을 가져다 대고 온몸으로 품어주는 장면을 보았다. 부모가 자신을 뱃속 털에 품어주었던 것처럼 자그마한 날개를 한껏 펼쳐 어떻게든 친구를 따듯하게 해주려 하고 있었다. 아마 옆에서 같이 허들링을 하던 친구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새끼 펭귄은 쉼 없이 짹짹거리던 울음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These chicks have learned an important life lesson.
The colony only survives by standing together.
새끼 펭귄들은 중요한 삶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함께 견뎌야만 무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요.
저마다의 눈보라를 헤쳐나가느라 바쁜 와중에도 마음이 얼어붙어 죽어가던 나를 기꺼이 품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나중에 힘들 때 이들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려면 나 또한 끝까지 살아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한 가지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나를 죽이지만 또 다른 사랑이 나를 살린다. 오늘도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을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한다.
(출처:
https://youtu.be/WS-7eFpzNhQ?si=ifbLVQii_zPOca8j
남극의 눈물 - 얼음대륙 남극의 주인인 펭귄의 삶
https://youtu.be/D6hzbreR-vM?si=DNBl6Fxk9kDbeuBO
새끼 황제펭귄들을 덮친 남극 폭풍...|'베어 그릴스'의 혹독한 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