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 상담의 시선으로 다시 빚는 ‘진정한 자기’
퇴사 후 3개월 차, 나는 다시 일하게 되었다.
이전 회사의 퇴사의 가장 큰 동기는 좀 더 성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잠깐 생겼던 공백 속에서 수많은 혼란과 걱정, 스스로에 대한 믿음들도 옅어지곤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는 대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을 찾기 위해 나는 꾸준히 면접에 도전했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며, 속으로는 아직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말이다.
매 순간 면접에서 최선을 다 하려는 날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 최근에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과 동일한 분야였고 8년 차 '경력직'의 포지션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입사 후 겨우 다음날, 면담을 요청한 상사의 입에서 나온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그 한마디는 내 내면을 크게 흔들었다.
나는 실무력과 진정성, 체계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늘 한결같이 역할을 해왔다. 그런 나를 믿고 어떤 조직에서도 묵묵히 역할을 해냈다고 믿어왔다.
교육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직접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실행해 왔고, 그들과 깊이 있는 관계(라포, Rapport)를 형성하며 함께 성장해 왔다.
방향성과 전문성이 분명한 내 이력을 신뢰해 준 상사들을, 나는 이전의 현장에서 분명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늘 도전했고, 선택해 왔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이런 말을 듣게 된 걸까.
단지 그 한마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업무들인데도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흔히 말하는 ‘조직 적응’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히 환경의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어긋나는 리듬, 설명되지 않는 요구, 예고 없이 주어지는 책임들.
그래서 나는 이 혼란을 탓하기보다는, 지금의 나에게 더 귀 기울여 보기로 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의 인간중심 상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자아실현 경향성(actualizing tendency)'을 지닌 존재다.
이 경향성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닌 잠재력이며, 자신을 긍정적이고 통합된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본능적 동기이기도 하다.
로저스는 내담자 역시 자신의 마음을 그것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 곧 무조건적인 존중과 공감적 이해, 그리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경험하고 받아들인다면, 자기 자신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로저스의 이론을 사랑한다. 물론 어떤 이는 이러한 이론이 너무 지나치게 정서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로저스를 깊이 존중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 경험을 '현상학적 장(phenomenological field)' 안에서 다루게 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장이란, 개인이 지금 이 순간에 지각하고 있는 세계, 그 주관적 현실을 의미한다.
로저스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경험하는 현실 안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철학은 나에게 전문가로서의, 사람을 다루는 일에 있어 지켜야 할 존중의 태도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내면의 울림이 되기도 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진정성과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시간들이 있었다.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수많은 벽들 앞에서 때론 온 힘을 다해 도전했고, 때론 그 벽의 높이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목이 메이던 건, 노력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리고 이렇게 날 겨우 며칠도 안 본 타인의 평가에 의해 휘청거리는 마음도 느끼며 말이다.
그래서 요즘 새롭게 시작한 일에 대해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중이지만, 나는 계속 내게 되묻고 있는 중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정말 나답게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가진 이 경험들은 어디서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일에서든 정량적 성과는 중요하다. 성과는 말 그대로, 결과를 증명해 주는 언어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늘, 내가 만났던 프로그램 참여자들,
지속가능한 의미와 성과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던 동료들과의 시간들.
사람들이 다시 찾고 싶어지는 브랜드,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프로그램과 상담을 제공하려던 순간도 떠올려본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관계와 신뢰 위에 쌓인 결과가, 사람들이 다시 찾고 싶은 ‘브랜드’가 된다. 그때야말로 기획자이자 상담자로서의 전문성이 드러난다고.
우리들도 이런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성장을 목표로 살아가는 동안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넘고 건너야 할 파도는 앞으로도 수없이 닥쳐올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과거의 족적, 어떤 경험과 자산을 쌓아왔는지만큼은 스스로 절하하거나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나 역시 타인에게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를 곱씹기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려 한다. 그 마음이, 다음 파도를 건너게 해 줄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혼란의 순간마다, 나는 나에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 그리고 나와 같은 우리에게 해야 할 질문들을 다시 꺼내보려 한다.
'지금, 난 나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