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느 고등학생의 트라우마가 한 상담사로

트라우마(PTSD)로 인한 아픔을 인정해 이겨낸 광장공포증의 이야기

by 유다월

나는 마치 낡은 기계 부품 같았다. 입시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잘 가공되어야 할 상품에 불과했다. 특히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수시 정책이 급변하면서 학교는 온통 불안과 경쟁의 열기로 가득했다. 입시를 코 앞에 둔 학생의 열망 및 불안함들을 공부시켜야 하는 학교의 의지가 뒤섞여 숨 막히는 공기가 교실을 지배했다.


당시에 그런 분위기 속에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 반까지 공부를 위해 눈을 뜨고, 밥을 먹는 생활을 1년간 하며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다. 맹장 수술의 범위가 상당히 커서 어린 나이지만 몸의 회복이 잘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원래 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해오던 음악을 다시 진로와 입시로 잡고,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시골에서 도심의 학원까지 매일 오갔다.

하지만 시골-도시 간의 시외버스 2시간을 다녀야 하는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결국 다시 정시 입시로 돌아와야만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고3이 되었고, 일방적으로 정해진 반의 분위기와 자습 시간을 강요하는 담임교사와의 갈등은 심각했다. 그는 마치 내가 속한 집단의 완벽한 통일성을 방해하는 이물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당시 심지어 반 아이들도 알던 아이들이 아니라 적응이 어려웠고 난 당시에도 음악을 했던 이유로 내신만을 믿고 밀고 가기엔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 고3이여도 수상성적이 몇 개 있던 문예쪽에 희망을 갖고, 문예창작학과를 가기 위해 예체능 특기자로 자습 면책권을 이야기했다.


그 부분에서 담임 선생님과 가장 큰 갈등이 생겼다. 처음엔 어느 정도 할애해 주려던 담임 선생님의 언어와 태도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날카로워졌고, 반 아이들에게는 내가 왜 자습을 빠지는지에 대해서도 소통이 잘 안돼 심하게 부딪히기도 했다. 급기야 결국 담임교사는 "네가 이대로 가면 생활기록부에 1년 동안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적을 것이고, 회사 입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알아두라."는 식의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여전히 기억이 난다, 주말 자습을 빠진 내게 '개보다 못한 애'라고 했고, 내 성격이 너무 문제가 있다며 '집단 조직에 절대 어울리지 못하고, 적응력도 문제가 많은 학생', "문예는 예체능이 아니다." 하셨던 그분.


글쎄, 이젠 이 사건과 약 20년 전이라, 작별한 지는 꽤 되었지만 최근에 우연치 않은 계기로 그분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 지부장을 하신다고 들은 적이 있다. 확실히 그분은 나름 자신의 소신과 원칙이 분명한 교사다. 그러나 그 소신과 철학이 반드시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여전하게 그분은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했던 교사였던 것 같다.




아무쪼록 앞서 말한 대로, 그렇게 숨 막히는 1년을 보내고, 나는 결국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성적에 맞춰 낯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내 안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극심한 우울증이 나를 덮쳤고, 어느 날부턴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탁 트인 공간의 압박감이 숨을 조여왔다.


'우울증', '광장공포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나는 내가 겪는 고통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걸 바로 '트라우마,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 한다. 큰 상처를 뜻하는 라틴어 트라우마(Trauma)가 말뿌리이며 원래는 뚫리다, 다치다, 상처라는 뜻의 고전 그리스어 τραῦμα(트라우마)에서 유래하였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나 사고뿐만 아니라 집단에서도 충분히 느꼈던 충격과 공포는 뇌에 트라우마를 강하게 남기게 된다.


출처: Unsplash(언스플래쉬)

정신의학적 정의로 깊게 보자면 트라우마는 단순히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그 사건이 우리 뇌와 몸에 남긴 흔적이다. 뇌는 충격적인 사건을 '위험'으로 인식하고,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과도한 방어 반응을 일으킨다. 나에게는 탁 트인 공간과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위험'의 신호가 된 것이다. 당시 1년을 담임 교사와, 반 학급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긴장감으로 버텼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라우마 치료는 매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 역시도 학창 시절의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발표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이젠 오래된 일임에도 당시에 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여정을 오래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은 마치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는 것과 같았다.

현대에는 다양한 트라우마 치료기법을 쓸 수 있겠지만, 나 혼자서 스스로 했던 방법은

먼저, 내 상처를 인정하는 용기였다.

자책 대신, '내가 아팠구나'라고 스스로를 보듬어야 했다.


다음으로,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대학 상담사 선생님들, 실제 상담센터도 다니며,

또한 무엇보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 그 사건이 동기가 되어 청소년교육상담학을 복수 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 이론을 공부하며, 내담자를 지켜낼 수 있는 내가 되고자, 나를 지켜낼 수 있는 내가 되고자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 노력했었다.

그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들을 통해 깊었던 우울, 그리고 특히 광장공포증에서는 많이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광장공포증을 이제는 이겨냈다고 해서, 내게 상처를 준 과거가 사라진 것도, 흉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 상처의 흉을 조심스레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그 흉터는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는지 보여주는 증표가 된 것 같다.




그 아픈 기억 속에서도 나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내담자와, 학생들에게 조금은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학생에게 해서 안되는 말들을 듣는 순간이 생긴다면 그 학생을 대신에 내가 나서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었고, 내담자의 개인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연습과 노력으로,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자 했다.


"괜찮아." 라고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상담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도 용기낼 수 있는 글들을 남기며. 언젠간 더 깊은 뿌리를 가진 내담자가 될 수 있길 항상 기도하며.


TO.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상처가 언젠간 당신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나 방패가 될 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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