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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Sep 17. 2024

휴가의 진정한 의미

ep.5






휴가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Vacance는 '텅 비어있다'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말의 품격> -이기주-





휴가를 떠나 숙소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휴식상태로 돌입한다. 옷걸이만 걸려있는 텅 빈 옷장, 필요한 가구들로만 채워져 있는 공간, 침대에 포근한 침구만 있는 방, 그 너머로 드리우는 자연풍경. 텅 비어진 공간 속에서는 마치 흰색 스케치북에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상상하는 것처럼 설렌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에너지가 샘솟고는 한다.


우리 집도 여행을 갔을 때처럼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마치 여행 온 듯 꼭 필요한 물건들만 소유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매일이 여행인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계속 똑같은 공간에 있다면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은 없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물건들로 뒤덮여 있는 공간이 아닌 비워낸 공간 속에서는 휴가를 온 것처럼 진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휴가의 어원이 '텅 비어있다'는 것처럼 나의 집이 일상 속 지치고 힘든 일들을 비워내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얼마 전 신랑이 미국으로 3개월간 장기 출장을 다녀왔다. 아빠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딸아이는 아빠를 못 본다는 생각에 너무나 슬퍼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새벽, 결혼하고 처음으로 신랑의 눈물을 보았다. 아빠가 가는 기척을 느꼈는지 자다 깬 딸아이가 아빠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


"아빠, 지금 가는 거야?


딸아이의 물음에 신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가 미국으로  떠난 뒤 딸아이는 매일밤마다 아빠를 찾았다.


"엄마 있잖아... 아빠가 없으니까 집이 허전하고 이상해. 아빠가 나를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아빠와 영상통화를 할 때면 딸아이는 휴대폰을 붙잡고 뽀뽀를 하거나 가슴속에 꼭 안고는 했다.


"아빠... 제발 휴대폰에서 나와서 나를 좀 꼭 안아줘... 응?"


"엄마... 만화에서 나오는 비밀의 문 같은 게 진짜 있었으면 좋겠어. 문 열고 들어가면 아빠가 있는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말이야..."


그런 아이를 꼭 껴안으며 아빠가 돌아오면 우리 셋이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더디게 혹은 빠르게 흘렀고 기다리던 신랑이 돌아왔다. 3개월 만에 상봉한 우리 가족은 서로의 온기를 직접 느낄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했다.


딸아이의 여름방학 기간에 맞춰 우리는 베트남 나트랑으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8아이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딸아이는 예전부터 세계나라이름과 수도들을 외우며 자신은 이 나라들을 모두 여행할 것이라고 했다. 지구본으로 베트남 트랑 위치를 확인하고는 설렘을 가득 안고 여행을 떠나는 날만을 고대했다.


아이를 데리고 가는 첫 해외여행이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우리 가족의 목적은 시티여행보다는 휴양에 가까웠다.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리조트에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했다. 흥적인 것을 선호하는 나였지만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행에서는 완전히 즉흥적일 수가 없었다. 밤비행기로 내리는 공항에서 리조트까지의 픽업차량예약과 숙소 일정 등 꼭 필요한 것들만 미리 계획해 두고 나머지는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맡기기로 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그 순간 우리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꼭 먹어봐야 할 것들, 봐야 할 곳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가며 숙제 해치우듯 하는 그런 여행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걸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경해보기도 하고, 재미난 것이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하고 싶었다. 조금 쉬며 서로의 호흡에 집중하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 보며 무언(無言)의 마음을 전하는 휴식을 갖고 싶었다. 잠시 누워 하늘도 바라보고 일출도 바라보고 바다의 파도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여유로운 여행을 원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는 정말 그 순간에 충실했다. 물놀이를 하고 싶으면 바로 물에 뛰어들고,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가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해 질 녘 일몰 속에서, 이른 새벽 일출 속에서 우리는 그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3개월간의 헤어짐 속에서 느꼈던 상실과 외로움이 사랑과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순간들이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온전히 서로의 존재 자체가 쉼이며 휴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를 떠올릴 필요도, 미래를 걱정할 이유도 없이 지금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 내가 희망하는 미니멀라이프의 모습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편안하고 포근한 보금자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낸 집에서는 여행을 다녀와도 복잡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에 필요했던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로 넣어두기만 하면 되었다. 삶의 방식이 심플해졌고 나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과 일상생활의 격차가 크지 않을수록 여독이 덜 다. 일상생활도 여행 온 것처럼, 여행도 일상생활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쉼표가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미니멀라이프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집중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알아내고 원하는 것들로 채워갈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시간들을 말이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고요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바람 속에서 전방에 있는 물체를 구분해 내는 것도 쉽지 않다.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일들 속에서 진짜 소중한 것을 바라보고 찾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쉼'이 꼭 필요한 게 아닐까. 


매일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고 서로의 마음을 들어주는 행위와, 매일아침 눈뜨며 잘 잤는지 묻는 평범한 안부가 우리를 그 순간의 행복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임을 이제는 안다.


이따금 삶의 폭풍 속에서 지치고 힘들 때, 비움 속에서 고요를 찾을 수 있기를. 비움을 통해 진짜 보석을 구별해 낼 수 있기를. 그렇게 비워낸 새로운 그릇에 다시 또 담길 우리의 내일을 희망할 수 있기를.


특별하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날들을 위하여.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쉼' 그 자체인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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