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씨 Sep 13. 2024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ep.4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켈러-




8년 전 아이를 낳은 뒤 변해버린 내 모습을 거울로 마주할 때마다 자기 혐오감이 들었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도 원래의 내 체중보다 10킬로가 더 찐 상태였다. 65킬로에서 아이를 가진 후 매달 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만삭 때는 87킬로까지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5킬로 정도 빠지기는 했지만 붓기가 더해져서 옷을 입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내 몸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 살이 잘 오르지 않는 체질임에도 얼굴이 달덩이처럼 부풀 있었다. 불룩한 광대뼈 위로 붙은 살들은 눈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고 통통하게 붙은 볼살은 내 코를 더 낮아 보이게 만들었다. 억지로 화장을 더 진하게 하기도, 붓고 살찐 몸을 가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옷들을 걸쳐보아도 내 마음은 여전히 부푼 풍선처럼 공허하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거울을 보기 싫었다. 아이를 낳고 벌어진 골반은 이미 예전과 달라져있었고, 울룩불룩한 뱃살들로 인해 배꼽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튼실한 허벅지는 지방이 덕지덕지 붙어서 보기 싫은 셀룰라이트들로 뒤덮여 있었다. 발목은 부종으로 코끼리발목처럼 부어있었고, 얇디얇은 내 머리카락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매일 한 움큼씩 빠져나갔다.  


자기 비하와 혐오로 가득 찬 나의 마음을 물건들로 채워나갔다. 자기 사랑의 결핍은 달콤한 음식들로 채워나갔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아무리 채워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비싼 화장품을 사보아도, 비싼 옷으로 나를 한껏 위안해도 그 순간의 기분 좋음은 비눗방울처럼 곧 사라졌다.


마치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어둔 것처럼.

이 물건들이 지금 나에게 진정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몰라보고 계속해서 진주목걸이를 걸어댔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소비 이후에 몰려오는 죄책감과 불안한 감정들은 를 더 옥죄여 왔다.


기분전환을 위해 친구를 만나고 와도 그때뿐이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온 뒤 현실을 직시하면 더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애써 밝게 웃음을 지어보아도 마음속에는 늘 슬픔이 잔재했다. 상대와 나의 삶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교하고 내 삶을 평가하며 내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내기 위해 애썼다. 육아를 하며 매일 나의 바닥을 주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자책하고 질책하며 못난 엄마라 여겼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어주며 진짜 소중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건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위로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 위로가 닿지 못.


'너는 이미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 너의 존재 자체가 이미 사랑이야. 지금 너는 새로운 사랑의 결정체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잘 길러내고 있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해내고 있는 거야.'


나 스스로에게 해주어야 했던 말들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알아봐 주고 다독여줬어야 했다.


고통은 축복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유해 보았기 때문에 비움으로써 나에게 진짜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질로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는 삶은 늘 공허하다. 공허하기 때문에 더 많은 물질을 붙잡으려 든다. 이렇게 끊임없이 물질을 붙잡으려 드는 건 누구인가? 물질인 몸을 나라고 착각하는 무의식 속의 인격체들이다. 이 인격체들은 왜 물질을 붙잡으려 드는가? 물질이 실제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거울명상>- 김상운


내가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한다. 우리는 빈 몸으로 태어나 빈 몸으로 돌아간다. 근원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세상으로 나온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결핍을 물질로 채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수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물건들에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숨 막힐듯한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그러다 보면 삶의 어느 부분에서든 예기치 못하게 문제가 생겨난다. 몸이 아프다던지, 마음의 병이 생긴다던지, 계에 문제가 생기던지 말이다.


나의 경우 몸에서 먼저 이상이 생겼다.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심한 가슴 두근거림과 호흡곤란이 지속되었다. 예민함이 극에 달했고, 늘 불안감에 시달렸다. 별 의미 없는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가 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호의가 불쾌하게 다가오기도 했고, 아주 작은 일에도 집착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마음은 점점 곪아가고 있는데 겉으로는 계속 괜찮은 척했다. 그러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잠을 못 자기 시작하자 병원에서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받다.

 

'이런 것 하나도 못 이겨내는 나약한 인간. 남들 다하는 육아 자기만 혼자 힘든 것처럼 세상 고민 다 안고 살아가는 인간. 남들처럼 직장 생활하면서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편하게 애 키우고 살림하는데 힘들다고 약까지 먹는 한심한 인간. 덜 힘들어서 그렇지. 몸 편하고 여유로워서 팔자 편한 소리 하는 인간.'


내 머릿속에서 늘 나에게 외치던 말들이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이 병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세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생각들이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델마톰슨-









'나는 누구일까?'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 빚어진 이 생명체에 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어지는 것이 진짜 나일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나일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일까?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붙인 것은 영원한 이름일 수 없다.


이 문장을 처음 듣고 무슨 이런 모호한 말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조금씩 이 문장이 이해되기 시작하자 내 마음속에서 오묘한 빛이 느껴졌다.


그 빛은 오로지 모든 것을 텅 비워낸 마음속 빈 공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공묘유(真空妙有)" - 나를 텅 비우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한다는 명목아래 물리적 공간인 집을 비워내면서 생겨난 빈 공간이 마음속에도 반영되었다. '내려놓음', '텅 빈 마음', 혹은 우리가 '공(空)'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결국 텅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진짜 나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가치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는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빈 편안한 마음은 근원의 사랑이다. 나는 근원의 사랑에서 태어났고 그 일부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근원의 사랑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 태어나자마자 겪는 고통과 상실,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사랑과 미움의 감정들과 함께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생각했던 행복의 문이 닫혔을 때 그 앞에서 좌절하고 허망해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얼마나 많은 행복의 문이 열려있는지 알 수 있다. 미니멀라이프는 닫힌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나에게 무한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비움 속에서 무한한 공간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메인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이전 04화 내가 중고거래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