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니멀라이프>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과연 '미니멀라이프'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썼던 글들을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미니멀리스트만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저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는 언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보는 완벽한 미니멀라이프 말고 나만의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희망사항을 써보고 싶었다. '희망사항'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완벽한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나에게 주는 약간의 여지랄까.
'희망사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니까.
우리는 모두 상대에 대한 딜브레이커(deal-breaker)가 있다고 한다. 딜브레이커란 '이것만은 참을 수 없어.', '이 선을 넘으면 우리 관계는 끝이야.' 하는 기준선이다. 집안의 청결상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갖고 있는 그기준선을 넘어가면 참다가 결국 폭발하게 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폭발하지 않고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점이 필요하다. 그동안 나는 그 기준점을 지금 나의 삶과 가장 비교하기 좋은 SNS 속 타인의 삶 속에서 찾아왔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가구들, 각종 신문물들로 무장해 삶의 모든 편안함을 영위하는 모습,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의 살림들을 보면서 지금 나의 삶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의 늪에 빠뜨렸다. 그것이 보편타당한 기준점이라 생각하며 그 기준에 따라 타인을 판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이 나에게 그 기준의 잣대를 대고 판단하지는 않을지 두려워했다. 그렇게 자만과 불안이 동전의 양면이 되어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면서 타인의 삶 속에서 찾았던 그 기준점을 나의 삶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시선을 옮겨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늘 신기루처럼 잡을 수 없는 허상이 아닌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터전을 잡고 있는 나의 집, 나의 공간으로. 그렇게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진짜 내 모습을 바라봐주고, 나의 감정들을 마주하고, 과거의 상처받았던 추억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기준점을 내 삶 속에서 찾게 되면 비로소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게 된다.
나의 기준점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만족'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 삶의 모든 과목에 내가 만족하는 지점을 정해두는 것이 나만의 기준점을 세우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1년에 여행은 몇 번 정도 가야 행복감을 느끼는지, 술은 언제 어떻게 얼마나 먹어야 행복한지, 돈은 얼마큼 벌어야 살만한지, 내가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행복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과목별 만족지점을 자세하게 세워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안주하다'는 감정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이곳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적 감정이라면, '만족하다'는 감정은 마음이 충만해서 더 나아가고 변화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마음상태이다. 스스로의 만족지점을 잘 알면 변화하는데 불안함이 없게 되며 나 스스로를 우주의 일부로 인정하고 확장시킬 수 있게 된다. 자만이 아닌 겸손을, 불안이 아닌 평온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나'를 잃어버렸다. '빨리빨리'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등 사회적으로 약속된 이러한 통념들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것들이 기준이 되어 일을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거나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의 비교대상이 되기도 한다. 만족하면 안주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채찍질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온전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거나,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삼은채 진짜 내가 원하는 것과 타인이 바라는 내 모습을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진짜 나를 서서히 잃어간다.
나에게 미니멀라이프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더 이상 타인의 삶과 사회적 통념 속에서 비교하며 만족하면 안주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에게 있던 기준점을 나에게 가져와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만족지점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나는 여정 중에 서있지만,그 여정 속에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교경전 '대학(大學)'편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몸을 수양하고, 집을 정돈한 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면서 계속 머릿속에 든 생각이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였다. 나의 마음이 가장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을 때 '걷기'를 시작했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집 아래 있는 해반천 산책로에 내려가 하루 만보씩 걸었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사계절동안 거의 매일같이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복잡했던 마음이 걷기 시작하면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단순 명료해졌다. 슬펐던 마음은 내딛는 발걸음에 눈물과 함께 흘러나갔다. 내가 겪는 모든 고통은 모두 내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사함 속에서 나의 존재자체가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몸을 수양하고 나니 마음이 바로 서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로 서니 내가 사는 공간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비워내고 정리하면서 어지러웠던 마음과 생각들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사는 삶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내 마음의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따분하고 뻔한 유교경전 속 한 구절이 내 삶에 직접 들어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에게 '과거'라는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과거의 상처나 경험을 떠올려 현재로 가져오는 습관을 번복하기 위함이 아닌, 과거 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한 깨달음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온다. 우리는 지구라는 학교에서 학습하기 위해 태어난 작은 별이다. 이 세상에서 배움을 끝내고 돌아갈 때조차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빈 손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것들과 소유하게 되는 물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일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니 탐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가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물질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물질세계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물질을 탐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라니 말이다.
삶 속에서 지치고 힘들 때 혹은 나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있던 힘이 빠지고 땅을 딛고 서있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내려가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저앉아버리고 싶어 진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린다. 인생이 무상한 것이며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옛 성인들의 말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무엇하려 이렇게 아등바등 갖지 못해 안달을 내며 잡지 못해 내 마음을 불행으로 빠뜨릴까. 속세에 놓여 있는 모든 번뇌와 고민들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만이 내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일까?
그러나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모든 것이덧없음'이 아닌 고통과 번뇌가 주어지는 이유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학교에 학습하기 위해 온 영혼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배움을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 속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무상하고 의미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무의미함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 자체로 의미 있어지는 상황을 통해 배워나가자.'의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축복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고 무의미함 속에서 존재의 유의미함을 찾아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일반상대성 이론에서는 "중력은 시간과 공간의 굴곡이다."라고 말한다. '나'라는 질량이 시공간에 존재함으로써 굴곡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특수상대성 이론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가진 속도와 거리에 따라서 시공간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속도와 거리에 따라 나의 과거, 미래는 누군가의 지금인 것이다. 모든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지금인 것이다. 그러함으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만물을 가장 작은 입자로 쪼개어 보면 전기를 띠는 에너지 덩어리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우리의 몸에서 모든 물을 빼내면 내 몸의 70%가 사라진다. 내 몸에서 모든 음식물을 빼내면 몸의 살과 근육이 사라진다. 몸에서 모든 박테리아를 빼내면 몸의 뼈가 사라진다. 그렇게 내 몸이 텅 비면 나의 생각과 감정들도 저절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칼세이건의 말처럼 정말 우주는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일까?
나에게 미니멀라이프는 내 마음을 우주로 확장하는 연결고리였다. 결국 광활한 우주 속에서 작은 먼지로 살아가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살아가는 '나'. 내가 살아가는 작은 공간 속에 물질로 가득 채워두었던 것들을 걷어내고 나니, 우주 속에 살아가고 있는 진짜 내가 보였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먼지 같은 나의 존재를 생각하며 겸손함을 배웠다. 그리고 작은 존재가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임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잠시 빌려 쓰는 것임을 알아가고 모든 것을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비우고 내려놓는 행위가 아무것도 의미 없는 무의미함이 아니라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이며 충만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헤아릴 수 없이 넓은 공간과 셀 수 없이 긴 시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과 찰나의 순간을 그대와 함께 보낼 수 있음이 큰 기쁨이었다.
-칼세이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나와 스치는 모든 인연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나를 스치는 모든 물질들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넓은 공간과, 셀 수 없이 긴 시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과 찰나의 순간을, 지금 이 글을 통해서 함께 할 수 있는 독자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