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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Oct 04. 2024

내향형 인간의 관계정리

ep.10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칼릴 지브란, <예언자>중에서






어른들이 용돈을 주면 어쩔 줄 몰라하며 울었던 아이. 앉은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있던 아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했던 아이. 어린 시절의 나였다.


지금도 이따금 누군가 나를 칭찬해 주거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면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럴 땐 내가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러면서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는 나를 알아봐 주기를, 나를 찾아주기를 늘 갈망했다.


나는 새 학기가 싫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모든 관계까지 새로운 상황에 놓일 때면 청난 스트레스를 받고는 다. 초등학교 5학년때 부산에서 김해로 이사를 가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내향적인 성격의 나는 전학을 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차라리 모두가 친하지 않은 새 학기 때는 조금 낫다. 그러나 전학을 가게 되면 이미 친해진 친구들의 무리 속에서 나 혼자 새로운 상황에 놓이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힘든 나에게 이미 친해진 친구들 속에 섞여야 한다는 게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전학 간 첫날 내가 원피스를 입고 왔다는 이유로 같은 반 여자친구가 나를 공주병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은 원피스를 입으면 안 되는 나이인가?' 혼란스러웠다.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는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오는 여자친구들이 많았고 바지를 입든 치마를 입 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치마를 입는 5학년 여자아이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주위를 둘러보니 치마를 입은 여자친구는 나 밖에 없었다. 아무도 치마를 입고 학교에 오지 않았고 모두 바지나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그 뒤로 치마나 원피스는 절대 입지 않았지만 나를 공주병이라고 험담하던 같은 반 여자친구는 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매일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서 펑펑 울었다.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 엄마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며 상황을 말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아빠와 한바탕 싸운 뒤 분노의 빨래 중이었던 엄마에게는 아마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았다. 아무도 내 마음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래도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더 깊이 혼자만의 동굴로 숨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지를 늘 염려하고 신경 쓰기 시작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몇몇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따돌림은 자연스럽게 없어졌지만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영향을 준 사건임에 틀림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나름 학습된 외향적 성격을 띠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이나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어색하고 힘들다. 다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오히려 말을 많이 하거나, 과하게 웃거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나를 낮추며 상대방에게 과한 배려를 하고는 한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바보 같은 내 모습을 복기하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질책하고는 한다.










모든 관계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한 거리는 과연 얼마만큼일까?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느 순간부터 삶 속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진 것 중의 하나가 '관계'였다. 사람 인( 人) 한자를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났다. 사람이 서로 기대어 서있는 모양. 사람은 서로가 함께 있을 때 사람 다울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민이다."라고 했다. 나 역시 일부 동의한다. 나의 모든 고민과 마음의 고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애쓰면 애쓸수록,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가 생각한 배려가 상대에게는 배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를 억누르고 타인의 기준으로 내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모두가 다르게 생각하는 관계의 거리와 기준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왜 이리도 무수한 타인들을 내 삶에 들여놓고 나를 흔들게 놔두었을까? 심지어 내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보다도 더 크게 차지하도록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말이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라이프를 통해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내 마음속 타인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공간들도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죽박죽 엉켜있던 실타래처럼 복잡한 마음이 하나둘 정리되었고, 늘 힘들게만 느껴졌던 인간관계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아무리 내가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려 애써도 주변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럴 때 나는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으로 상대의 '정직과 겸손함'을 파악해보려고 한다. 상대의 '정직과 겸손함'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나의 '정직과 겸손함'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항상 관계에서 상처받는 나를 보며 엄마가 늘 해주셨던 말씀이 있다.


"네가 좋은 사람이면 네 주변에는 늘 선하고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너는 마음이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네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로 가득할 거야."


이 말은 내 머릿속에 항상 주문처럼 들어가 있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는 중요한 다섯 가지 요인(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우호성, 신경성)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의 성격을 인격으로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여섯 번째 요소가 바로 "정직과 겸손성"이라고 한다. 이 정직과 겸손성은 후천적인 영향이 큰데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잘 단련하면 인격과 성품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정직이 너무 과하면 타인에게 종종 상처를 입히고는 한다. 반대로 겸손함이 너무 과하면 모순덩어리에 재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직과 겸손 사이에서 적정한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높지도 너무 위험하지도 않게.


몇 년 전 병원에서 피검사를 했는데 중성지방 수치가 갑자기 높게 나온 적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평소 술도 많이 안 시고 체중도 정상범위인데 이렇게 중성지방 수치가 높게 나온 건 유전적 요인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부모님께서 술을 많이 드셨냐고 물어보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아빠의 전적이 떠올랐다. '술'이라 하면 내놓으라 할 정도로 주당이었던 두 분이었기에 나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한채 중성지방을 낮춰주는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내 마음속에서는 '엄마아빠 때문에 내가 이런 거구나' 하는 약간의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선생님께서 '환자분의 부모님께서도 이런 요인으로 인해 어떤 질병을 앓거나 힘드셨을 수도 있으셨겠어요.'라고 말했다면 내 마음이 원망으로 향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과 겸손의 이상적 모습이 아닐까. 그런 모습은 그 사람의 인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정직과 겸손함을 단련하려 한다. 상대가 기분 나쁘거나 이상한 말을 던져도 그것을 나에게 흡수시키기 전에 정직과 겸손함의 필터를 써서 한번 번역해서 들으려고 노력한다. 다만 모든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의 에너지가 너무 소진될 테니 나 가깝거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 필터들을 적용시키고는 한다.


사실 가까운 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말에는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고 무례한 사람을 만나서 소중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 스스로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러나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 쉽게 상처받고 나 역시 쉽게 상처 주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직장동료와의 관계등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은 가까운 관계 속에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출퇴근 시간의 만원 버스나, 지하철처럼.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불편함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결혼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가 되고, 신랑은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나는 빨래, 설거지, 요리, 청소등의 집안일을 해야 하고, 신랑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사회생활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는 모든 관계에서 공정함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공정함과 흔히 혼용되는 공평함은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반면 공정함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치우치는 쪽에 베네핏이나 페널티를 줌으로써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와 어른이 함께 하는 게임에서 신체적 조건을 감안한 베네핏을 아이에게 줌으로써 동등하게 게임을 치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공정함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공정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럴 수도 있지.'라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는 페널티를, 내가 가진 부분이 상대에게 없다면 베네핏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페널티나 베네핏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며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감사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 누구나 다 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누구나 다하지만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대단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


신랑이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우리 가족을 지키고 우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와 휴식처를 제공해 주는 것이 감사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 하기 싫지만 자신과 싸우며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텨내는 일을 해내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


부모님께서 자식에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부모님의 꽃다운 청춘과 젊음이 담겨 있는 시간의 헌정이었음을 인정하는 것.  


자식이 태어나서 나에게 기쁨을 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축복임을 아는 것. 아픔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고,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맬 때에도 옆에서 기다려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얽매이게 만드는 관계의 족쇄에서 풀려날 수 . 억울하고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상대가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감사를 전해주면 그 감사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일이 많아져서 늦게 마치게 되는 날, 저녁도 제시간에 먹지 못하고 일하고 온 신랑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감사함의 표현은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그 감사함의 표현이 다시 나에게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는 모른다. 다만 나의 감사함이 상대에게 닿았다면 언젠가 반드시 어떻게든 돌아온다. 인생은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공정하니까. 마음과 나의 생각이 변하자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사랑과 감사함의 표현이 되어버렸다. 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행위가 된 것이다. 내 마음과 생각, 그리고 시선이 변하면 관계 속에서 생겨난 모든 문제들도 변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과 생각, 관점이 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워내야 한다. 마음과 생각에도 여백을 만들고 빈 공간이 있어야 변화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숨 쉴 수 있는 공간, 여백이 필요하다. 그 여백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속에서 말하는 '거리'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삶의 여백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관계의 적정한 거리란, 정직하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나를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여백이며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게 되는 숨 쉴 공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정교하게 균형을 맞추면 나만의 개성 있는 색깔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만의 향기를 가진 개성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지브란, <예언자>중에서











메인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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