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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Oct 08. 2024

대문자 F의 감정정리

ep.11






강한 의지력으로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탓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정리는 의지력의 몫이 아니다.

-김경일 <지혜의 심리학>중에서-






너무나도 감정적인 인간인 나는 대문자 F이다. 타인의 슬픔도 내 슬픔인 것처럼, 타인의 아픔도 내 아픔인 것처럼, 타인의 기쁨도 내 기쁨인 것처럼 공감하는데 익숙하다. 특히나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대방의 기분에 의해 나의 기분도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나를 두고 신랑은 '난초'같다는 표현을 하고는 한다. 기르는데 손이 많이 가는 난초는 잎에 먼지가 끼지 않도록 계속 닦아주고 교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면 나는 그 고통이 마치 내 고통인 것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서 혼자 고민하고 속앓이를 한다. 사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임에도 나는 나의 감정과 신경을 모두 곤두세워서 그 사람의 문제에 함께 풍덩 뛰어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이따금 여행을 떠날 때면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에 들뜨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은 늘 불편함이 잔재해 있었다. 엄마를 혼자 두고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행 중에도 하루에 수차례 엄마와 통화를 하고 엄마 목소리를 통해서 엄마의 기분상태를 체크하고는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힘이 없거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그때부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왔으니 신나게 놀고 싶은 마음과 집으로 돌아가서 안정감을 찾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갈등했다. 우유부단한 성격답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계속 불편한 마음을 가진채 여행의 시간들을 흘려보내고는 했다. 그래도 엄마가 이모들이나 엄마 친구들과 함께 있는 날에는 좀 나았다. 그럴 때는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가 밝기 때문이다.


신랑과 연애할 때나 결혼초반에 서로 다툼이 생길때눈물부터 났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했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억울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감정이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않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독심술을 해서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란 말이야!'


자기 생각대로 잘 안되었을 때 어찌할 줄 몰라 울며 떼쓰는 어린아이들처럼. 나를 억누르고 속이며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숨겨놓으면 없어질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워버린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 감정들은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내가 무방비한 상태일 때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신랑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하나둘 꺼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눈물부터 흘리는 나는 그 상황을 일단 회피하려고 했다. '나도 몰라. 지금 말 안 하고 싶어.'라며 밀어내는 나를 붙잡고 끝까지 물어봐주고 내 마음을 표현하도록 기다려주었다. 이따금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 회피하지 않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연습을 했다. 어쩌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왜 그리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생각에 집착했을까.


'나는 억울해.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너에게 맞춰주고 있는데... 이런 나를 변하게 하지 마. 너로 인해 내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 제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줘.'


그런데 사실은 이 말들 속에 숨겨진 뜻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탓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내 마음속에는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불안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니 제발 나에게 이렇게 대하지 말아 줘.'라는 절규에 가까운 부탁이었던 것이다. 


'울지 마. 짜증 내지 마. 화내지 마...'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내 본모습은 억누르고 지워버린 채 내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진정한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다. 감정을 다스리려고 강한 의지력을 내세워 애써 누르고 참아왔지만, 사실 감정정리는 의지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내고 짜증 내고 울어버린것들이 약하고 바보 같은 나의 의지력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나를 불신하고 미워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인생이라는 여행에 있어 무엇을 가지고 갈지, 무엇을 버리고 갈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이라는 모험을 위해 각자의 소중함을 가방에 담는다. 누군가에게는 넉넉한 돈다발이나 충분한 식량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을 기록하기 위한 일기장이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담기 위해 가방을 비우는 '작은 용기'일 뿐이다.

-이용준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고민>중에서-




나는 마음껏 어질렀다가 한꺼번에 정리하는 식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정리방식이 몸에 익은 이유는 불필요한 물건들의 무분별한 소유 때문이었다. 감정에 의한 소비가 많아질수록 불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지게 된다. 감정적으로 한 소비는 내가 진짜 필요해서 산다기보다 그 순간의 기분에 의해 구매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힘드니까 립스틱 하나를 선물해 주겠어.' '살건 없지만 오늘은 기분이 뭔가 하나 사야지 좋아질 것 같아.' 그러면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쇼핑하며 한두 번 쓰이고 버려지거나 혹은 한 번도 안 쓰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예쁜 쓰레기들을 사서 모았다.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고 지향하면서 물건들을 하나둘 비워낼 때마다 내가 사모은 예쁜 쓰레기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감정들도 바라봐주게 되었다. 물건들이 나에게 들어오게 되기까지는 분명 나의 마음과 감정이 영향을 미친다. 그런 물건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비워내기 시작하자 내가 외면하고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바라봐주게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였다. 집을 돌아보고 물건을 비워내기 시작한 때가. 아이를 등원시켜 놓고 집으로 돌아와 집의 한 구역을 정해 물건을 비워내고 정리했다. 그렇게 내 속을 시끄럽히던 공간들의 물건을 대부분 정리해놓고 나자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외부 충격에도 금이 바사삭 가버릴 것 같았던 유리멘탈이었던 내가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물건을 비워낼수록 내 마음은 더욱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애써 지우고 외면했던 모든 감정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외쳤다. 혼자 해반천길을 걸으며 슬픈 감정과 함께 펑펑 울기도 했고, 불안한 감정을 알아봐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화나고 억울한 감정들은 꺼내어 걸어내는 한걸음 한걸음에 흘려보내주었다. 그렇게 감정은 내 속에서 없애고 억누르는 게 아닌 밖으로 꺼내어 바라봐주고 인정해 주고 흘려보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매크리 교수는 행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범위를 좁게 한정시키지 않고 시야를 넓힐수록 운이 좋아진다고 했다. 자신의 범위를 좁게 한정시키는 행위가 어쩌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꺼내어 넓은 곳에 보내주면 금세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나의 시야도 넓어지고 마음도 넓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깥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초점을 맞춰놓고 그 소리와 맞서 싸우면
 내 마음은 시끄러운 소리와의 싸움터가 된다.

반면, 텅 빈 공간의 고요에 초점을 맞춰 놓고
귀를 기울이면 내 마음은 고요해진다.

-김상운 <왓칭>중에서-





이따금 마음이 시끄러운 소리에 초점을 맞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릴 때면 집안의 빈 공간으로 도망가려 한다. 비어있는 서랍장 하나, 여유공간이 남아있는 주방찬장을 열어보며 마음의 고요함을 찾는다. 그렇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담기위해 가방을 비워보는 '작은용기'를 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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