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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21. 2024

나의 기도

11월 21일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 신이 계신다면 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고, 나는 신의 더 큰 뜻을 헤아리려 하기보다 그의 존재 여부에 의심을 가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나는 도서관 사서로 일을 하며 삼수를 했다. 원하는 대학이 또렷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과를 진학하고 싶은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유명한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그때는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제가 원서 넣은 4년제 대학에 입학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신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한참 뒤에 나의 기도에 응답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으로부터 불합격 소식이 왔던 날, 책상밑에 들어가 소리쳤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저 세상의 빛이 보기 싫었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나는 대만으로 유학을 갔고, 대만에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식을 보러 온 엄마와 함께 간 대만의 용산사에서 기도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때 내가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했다면, 우리 집 형편에 대만으로 유학까지 와서 대학을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돌아보니 신은 늘 나와 함께였다.








대만 유학당시 마음속 허기짐을 음식으로 가득 채우려 했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먹는 것으로 행복함을 채우려 했다. 야식을 먹고 바로 자거나 늦게까지 리포트를 쓰며 군것질 거리를 편의점에서 잔뜩 사와 입에 넣었다. 음식으로 어르고 달래며 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해내야 한다고, 여기서 졸업해서 돌아가야만 한다고.


가슴에 돌멩이를 얹어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누워도 잠을 못 이뤘고, 일어서도 가슴이 타들어갈 듯 아팠다. 위장이 뒤틀리며 뻣뻣해져 왔고, 화장실도 잘 가지 못했다. 병원에 가도 소화제만 처방해 줄 뿐, 약을 먹어도 듣질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손끝발끝까지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손이 노랗게 변하면서 저려왔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는 하지만 음식물이 들어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끓여주는 죽을 먹고 따뜻하고 포근한 집에서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학기를 마쳐야만 했고, 나에게는 기말고사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나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쪽잠에 든 사이에 꿈을 꾸었다.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백의(白衣) 관세음보살님이 손을 내밀었다. 기다랗고 하얀 소매 끝이 내 눈앞에 축 늘어졌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잡고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입버릇처럼 알려줬던 말이 있었다. "힘들고 무섭고 두려울 때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마음속으로 찾으렴." 아프거나 무섭거나 두려울 때 항상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다. 어떻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외기만 했다. 그 꿈을 꾼 뒤로 조금씩 건강이 호전되기 시작했고 나는 무사히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요양할 수 있었다.


뒤돌아 보니 신은  나와 함께였다.








1년 전 건강검진에서 담석을 발견했다. 작은 돌 7개가 담낭 안에 있는데 이 아이들이 움직이면서 한 번씩 경련을 일으키고는 했다. 경련은 꼭 밤늦게 혹은 새벽에 일어나고는 했는데 바로 누워도 옆으로 누워도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오른쪽 갈비뼈 통증과 함께 등 쪽의 결림이 심하게 나타났다. 허리를 너무 많이 펴도 아프고 굽혀도 아팠으며, 식은땀이 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게 오고는 했다. 그럴 때면 응급실에 가서 진통제를 맞아야 진정이 되고는 했다. 담석으로 오는 경련은 산통에 버금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러했다. 병원 두 곳 모두 외과에 가서 담낭절제술을 받기를 권유했다.


담낭을 절제하고 나면 통증은 없겠지만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니 식이조절과 우루사 복용으로 조절해보려고 했다. 사실 수술이 하기 싫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과식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혈당을 올리는 습관들을 자제하려고 했다. 평일에는 16시간 공복을 유지하려 했고, 공복 후에 먹는 첫 끼니에 신경 썼다. 2년 가까이 꾸준히 수영장에 다니며 심장이 뛰는 운동을 하려고 했다. 아침에 명상과 스트레칭을 하며 담낭이 있는 자리에 손을 올려두고 기도했다.


'저의 담낭이 자연의 질서를 회복해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해주세요.'


그리고는 건강한 담낭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마지막 경련이 온 뒤로 6개월 가까이 경련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른쪽 갈비뼈 통증은 이따금 지속되었고, 식사량이 좀 많다 싶으면 등쪽결림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한다고 생긴 돌이 없어지겠어?'라는 의심을 하다가도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조금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담낭 쪽 초음파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돌멩이가 더 커지거나 많아졌으면 어떻게 하지?', '그냥 수술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조바심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결과를 기다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계속 나의 초음파 영상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그 순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 이런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담석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1년 전 초음파 영상에서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장, 췌장, 간, 담낭등 복부 초음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기는 모두 확인했는데 전부다 이상 소견 없으시네요. 그래도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내년 검진 때 뵙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얼떨떨했다. 하나도?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다고? 부정과 의심을 반복하다 결국 감사함에 이르렀다.


신은 매 순간 나와 함께였다.








우리는 변화하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우주의 미세한 조각이다.

-존 휠러-



나의 의식이 무엇을 창조할 것인지는 내가 관찰할 때 갖는 '마음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신의 존재 여부가 궁금했던 나는 더 이상 '저 너머에' 있는 신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신'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플 때 꿈속에서 만난 관세음보살님은 엄마가 불교를 믿기에 나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나의 의식 속에서 창조된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든, 그 모습이 부처님일 수도, 관세음보살님일 수도, 하나님일수도, 우주의 무한한 빛일 수도 있다. 


여태껏 마음속에 신이 있다는 믿음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우주의 마음속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내 삶의 모든 순간에 '기도'로써 신을 초대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은 늘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신은 그저 질문하고 들을 뿐, 그 어떤 답도 대신 내려 주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기도가 곧 감정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순간순간
항상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순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일일이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감정이든 느끼기 마련이다.
매 순간순간이 기도이며 인생이 기도이다.

우리가 느끼고 기도하는 것이
신의 정신에 의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렉 브레이든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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