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대만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전거를 사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나긴 했지만 안 타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과연 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넓디넓은 캠퍼스를 이 더운 나라에서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학교 안에는 자전거를 판매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수리도 할 수 있고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을 수도 있었다. 당시 대만돈 1000원(한화약 4만 원)을 주고 핑크색 자전거를 샀다.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대만대학교 정문에서 도서관까지 야자수가 쭉 서있는 예린따따오(椰林大道)라고 불리는 큰길을 달려보았다. 이제 진짜 대만에서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학교에 입학 후 가장 처음 마주한 난관은 수강신청이었다. 대만의 학부과정은 전공과목 이외에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체육수업이었다. 고등학교도 아닌 대학교 학부과정에 왜 체육이 필수란 말인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체육을 싫어했던 나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졸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다양한 체육 수업 중에서 내가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가, 골프, 테니스, 탁구, 수영, 배드민턴, 태극권등 다양한 종류의 체육수업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체육수업은 수강하기가 어려워인터넷으로 수강신청에 실패할 경우 수업시간에 교수님을 찾아가 수강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직접 수강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 눈치게임은 나를 상당한 패닉에 빠뜨렸다. 내가 듣고 싶은 체육 수업에 갔는데 수강신청인원이 이미 다 찼거나 수강이 불가한 경우 동시간에 들을 수 있는 다른 체육 수업으로 냅다 뛰어야 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동식 수강신청 방법이었다. 결국 1학년 1학기에는 듣고 싶었던 체육수업 수강신청에 모두 실패하고 태극권을 수강했다.4년 동안 체육 4학점(체육은 1학점짜리 과목이었다.)을 모두 이수해야지만 졸업이 가능했다.
대만의 공원 같은 곳을 보면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태극권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기를 수련하는 운동의 일종인 태극권은 나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하시는 운동 같은 느낌이었다.
이 수업의 첫 번째 난관은 움직임이 느리고 장풍을 쏘아야 할 것 같은 동작들을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알려주시는 태극권 선생님의 설명을 엄숙하게 수강하는 것이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매시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웃으면 안 돼!!!!'
함께 수강한 한국인 동생과 함께 우리는 서로의 허벅지를 꼬집어 주며 수업시간 내내 웃음을 참아냈다. 40여 명의 대만 학생들 중에 끼어있는 두 명의 한국인 여학생이었기에 더더욱 진지하게 수업에 임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난관은 바로 중간기말 시험이었다. 배웠던 태극권 동작을 순서대로 외워서 선생님 앞에서 2인 1조로 짝을 지어해야 했다. 부끄러움 많은 성격인 나는 이 시험을 치뤄내기 위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어쨌든 태극권 수업을 무사히 통과하기는 했지만 태극권수업의 여파로 2,3학년때는 아예 체육수업을 수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체육 수업을 미루다 4학년 졸업을 앞두고 테니스 수업을 들었다. 공으로 하는 운동에 더더욱 젬병이었던 나는 정말 테니스 수업을 수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듣고 싶었던 체육 과목의 수강신청에 실패하는 바람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테니스 수업은 보통 실외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진행되었는데 한여름 11시 대만의 햇빛아래서 테니스 공을 치고받아내느라 시력을 잃을뻔했다. 아무리 강한 자외선차단제를 발라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있었다. 나는 분명 중문학과에 입학했는데 졸업의 문턱에서 나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체육이었다. 테니스 수업의 기말고사는 정해진 시간 동안 벽에 테니스 공을 연속해서 치는 것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기본으로 20개씩은 쳐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연속으로 공을 쳐내는 게 왜 그렇게 안되는지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10개만 쳐도 통과시켜 준다고 하셨다. 혼자 외국인이었던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시험에 통과했다. 사실 한두 번 공을 떨어뜨리고 연속으로 치지 못했는데도 선생님께서 눈감아 주셨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대만 친구들도 그런 나를 보는 게 안타까웠는지 모두 한마음으로 응원해 주었다.
"선생님 저는 지금 4학년 마지막 학기인데 이 수업을 이수 못하면 졸업을 못해요. 흑흑...."
웃음반 눈물반 섞인 나의 호소에 선생님은 너그럽게 웃음으로 받아주셨다. 운동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교과과정이니 나의 성실함과 열정에 점수를 주겠다고 하셨다. 테니스 수업을 듣는 4학년 2학기 동안 거의 매일 꿈을 꾸었다. 테니스 수업에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을 못하고, 한 학기 더 학교를 다니는 악몽을 꾸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엔 실내에서 경기영상을 보는 것으로 수업이 대체되었다. 테니스 실력이 안되니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라도 해야겠다 싶어 비가 오는 날도 햇빛이 쨍쨍한 날도 나의 분홍색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캠퍼스를 누볐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해주신 테니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씨에씨에 라오슬!!(謝謝 老師!!)
한국에서 2년, 대만에서 언어중심을 다니며 1년 반의 기간 동안 배운 중국어로 대만의 학생들과 대등하게 대학교 수업을 받는다 것은 말이 안 된다.그래서 대만대학교 중문학과는 국제학생반과 대만현지학생들반으로 나누어 전공수업을 진행했다. 국제학생반에는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국적의 학생들은 모두 화교학교 출신이어서 중국어가 모국어였다. 대만사람과 결혼한 미국인도 있었고, 한국학생이지만 화교출신의 학생들도 있었다. 처음 전공수업을 들어갔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대만에서 대학교를 들어오려고 했을까?'
이건 이제 막 한글을 뗀 유치원생이 대학교 수업을 듣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전공수업인 <중국역사와 문화> 첫 수업 때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언어는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중국어 실력이 대만학생들과 비등하지 않더라도 타국에 와서 다른 나라의 언어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자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의 생각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
멋진 말씀이었다. 비록 역사라는 과목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교수님의 말씀처럼 다른 나라의 언어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의 표현력은 비록 유치원생일지라도 나의 생각만큼은 내가 걸어오고 살아온 삶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한 전공수업들은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나를 좌절에 빠뜨렸지만지나고 보니 교수님들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우리의 중국어 실력이 아닌생각의 깊이였던 듯하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행동은 말에서 드러난다. 그 말과 행동들이 태도가 되고 나의 습관이 되기에 교수님들은 그런 모습들로 우리를 평가하셨던 것 같다.
1학년 동안 매주 금요일 10시에는 전공 수업인 <중국역사와 문화>를 들었다. 교수님은 5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여자 교수님이셨는데 말투와 걸음걸이 그리고 표정에서 깐깐함과 까칠함이 드러났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셨지만 내뱉는 말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흰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커트머리를 하시고 안경을 쓰고 계시는 모습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문학원 교수님 같은 분위기가 풍겨졌다. 이 수업의 첫 번째 과제는 도서관에서 중국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손으로 원고지에 리포트를 써내는 것이었다. 멘붕이었다. 우선 중국어로 된 책 자체를 읽어야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라니. 도서관에 가서 내가 이해할 수 있을만한 책들을 골라 펼쳐보기는 했지만 도무지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어떻게 리포트를 써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 생각을 두서없이 써냈고 나에게 다시 돌아온 리포트에는 빨간색 글씨로 매서운 교수님의 평가가 써져 있었다.
"大學生的報告不應該這樣!"
(이건 대학생의 리포트라고 할 수 없어!)
빨간색 글씨를 읽는 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오줌이 마려운 듯 아랫배가 져릿해오면서 척추를 따라 정수리까지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한동안 그 충격에 빠져 있던 나는 과연 무사히 졸업장을 따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매일 걱정하며 지냈던 듯하다. 그러나 시작을 했으니 끝까지 해봐야 했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좌절과 부끄러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배웠고 그래도 해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면서 말로 표현이 어려운 부분은 그림을 그리기도 교수님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뭐 거의 반성문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든 1학년의 길고 길었던 <중국역사와 문화> 수업을 겨우 통과했다.
1년간의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서 인지 2학년이 되자 조금의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중국어로 된 원서를 계속해서 보고 해석하고, 수업을 통해서 배우니 1년간의 시간만큼 성장했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었을 것이다. 2학년과 3학년때는 전공수업도 교양과목들도 비교적 순탄했다. 외국인이 이수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교양과목들은 제2외국어들이었다. 스페인어, 일본어, 만주어, 민난어, 객가어와 같은 각종 언어들을 교양과목 점수들로 채워나갔다.
그러다 4학년에 또다시 고비가 오고 말았다. 유명한 시인 '두보'의 벽을 넘지 못했다. 두보의 시에 대해서 해석하고 탐독하는 과목이었는데 1,2학기를 다 이수해야 하는 교양과목이었다. '이백과 두보'라는 이름이 익숙해서였을까. 나는 무슨 패기로 이 어려운 수업을 선택했을까. 10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큰 강의실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도무지 나는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수업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주 수업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강의실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나의 생각은 늘 다른 곳에 가있었다. 중간고사를 치고 나니 도저히 이 수업은 내가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두보'를 내려놓았다. 위대한 시인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생각주머니가 너무 작았던 것 같다.
대만에서는 F학점을 받는 것을 뻬이땅띠아오(被當掉)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땅을 당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땅을 당한 과목은 성적표에 빨간 줄이 그인다는 것이다.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통과하지 못했다고 성적표에 빨간 줄을 긋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빨간 줄이 그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성적표 관리를 할 수 있어서 점수가 안 좋거나 F학점이 있는 과목을 지우고 다시 다른 과목으로 학점을 채울 수 있었는데 대만의 대학교는 지우개 기능이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땅을 당했지만 성적표에 빨간 줄이 그어져서 나오지는 않았다. F라는 알파벳이 떡하니 쓰여 있을 뿐.
이쯤 되면 4년 안에 졸업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 다른 과목들을 열심히 수강했다. 갑골문, 동남아와 인도의 문화예술, 대만현대주의 소설, 근대동남아역사와 고적, 홍루몽탐독, 찻잎에 관한 수업 등 들을 수 있는 교양과 선택과목을 최대한 이수했다. 나의 분홍색 자전거는 넓디넓은 캠퍼스를 누비며 졸업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갔다.
졸업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은 순간들이 지나가고,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 두려움들도 지나가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사모를 쓰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과정들이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결국 그 과정들이 모두 연결되어 졸업이라는 문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장을 받고 성적표와 함께 대사관에서 모든 공증을 끝내고 대만에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모든 목표가 끝났을 때 후련함과 함께 해냈다는 뿌듯함이 폭풍처럼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