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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Jul 11. 2024

비와 대만 그리고 나

ep.17




장마철 후드득 내리는 빗소리와 습도 높은 더위는 나로 하여금 더욱더 대만을 그립게 만든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습도를 머금은 더위는 마치 우리 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다. 에어컨 없이 문을 열어두면 집안 바닥이 물기를 머금은 듯 축축해지고 빨래는 제습기가 없으면 뽀송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처음 대만의 높은 습도와 종잡을 수 없는 비소식을 겪었을 때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물에 젖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은 무거움과 예고 없이 내리는 스콜성 비는 정말이지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대만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6월이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는 태양이 작렬하는 뜨거운 날씨였는데 점심때쯤 되면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퍼부었다. 거기에 천둥과 번개는 옵션이다. 처음 대만에서 천둥 번개소리를 들었을 때 한국에서 들었던 소리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었다. 마치 하늘이 갈라질 듯 천둥이 치고 번쩍거리는 번개가 땅으로 내리 꽂혔다. 아침에 맑았던 날씨만 보고 우산을 준비해오지 않은 나는 수업이 끝나고 학교 건물 안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러면 정말 거짓말처럼 30분에서 1시간 이내로 비가 그친다. 비만 그치는 게 아니라 태양이 다시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다시 아침과 같은 쨍쨍한 날씨로 변했다. 끈하게 신고식을 치른 대만의 첫여름이었다.


8월과 9월에는 태풍의 계절이기도 하다. 타이펑지아(颱風假)- 태풍방학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태풍이 오면 학교들은 태풍방학을 한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의 우산이 뒤집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사람이 바람에 밀려갈 정도의 바람이 분다. 시간당 어마무시한 집중호우가 내리고는 했다. 이 많은 빗물들이 빠져나가는 배수시설이 대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럴 때는 식량을 구비해 두고 기숙사에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장마철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는 비가 오는 날보다 해가 쨍쨍한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대만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해가 쨍쨍한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겨울이 되면 해도 잘 안 뜨는 흐린 날이 한 달 내내 지속되면서 부슬비가 촉촉이 내린다. 우리나라의 겨울처럼 확 추운 것도 아니지만 물놀이 후 젖은 옷을 입고 차가운 공기를 쐬는 것처럼 으슬으슬하고 습한 추위가 지속되었다. 그럴 때면 유럽에서 유학온 학생들은 약간 정신줄을 놓기도 했고, 자살 소식이 종종 들려오기도 했다. 날씨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대만에서 지내면서 체감했다.






만으로 유학 가기 전 나는 비 맞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한 날 비가 오면 약속을 취소했다. 친구도 나도 비 오는 날 나가는 게 싫었다. 우리는 비가 오면 이 약속은 취소라고 이미 선포해 두고 약속을 정하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반곱슬인 내 머리카락은 유독 더 곱슬거렸고, 아무리 밝은 색상의 팩트를 발라도 낯빛이 어둡게 보였다. 치마를 입으면 걸을 때마다 흙탕물이 다리 뒤쪽에 튀는 게 싫었고, 바지를 입으면 옷에 흙탕물이 튀어서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 가죽가방을 들으면 가죽이 빗물에 젖어 볼품없게 되는 게 싫었고, 천가방을 들으면 천이 빗물에 젖어 축축해지는 게 싫었다. 그냥 다 싫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내 마음도 같이 흐리고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것 같았다. 내리는 빗소리가 구슬프게 들렸고, 어두컴컴한 바깥풍경이 우울하게 느껴졌다. 무슨 노래를 들어도 눈물이 났고, 유독 술이 그리워졌다.

그때의 나는 좋은 것보다 싫은 것 투성이었던 것 같다. 사진 속 내 얼굴을 보면 늘 어딘가 모르게 뾰로통하게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나는 웃고 있는데도 새침하게 화난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게 되고는 했다. 그래서 사진 찍을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좀 웃어!"였다. 난 웃고 싶은데 마음이 웃고 있지 않아서였나 보다.


그랬던 내가 일 년 열두 달 중 열 달은 비가 내린다는 대만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대만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대만 날씨에 호되게 당한 나는 여행 가는 마음으로 가져갔던 웨지힐 신발, 굽 높은 구두들을 모두 캐리어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곧장 야시장으로 가서 검은색 하바나 쪼리를 샀다. 기다란 장우산 보다 가방에 넣어 다닐 수 있는 튼튼한 3단 우산을 샀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아침에 나올 때 뽀송했던 내 발과 옷이 젖는 게 익숙해졌고, 고데기했던 내 곱슬머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구불거리는 게 당연해졌다. 악건성이었던 내 피부는 대만의 습기를 머금고 크림을 안 발라도 촉촉함이 유지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우비를 입고 한 손에는 우산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탔다. 아침에 아무리 햇빛이 쨍쨍해도 외출할 땐 꼭 3단 우산을 가방에 넣어 다녔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해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보이면 재빠르게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즐기는 여유도 생겼다. 페에 앉아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오는 재즈음악이 비 오는 날엔 유독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는 했다.







나의 20대는 대만이라는 곳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 같다.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늘 찾아 헤매던 걱정 많던 내가 대만에서 지내는 6년간 홀로 서며 진짜 나 자신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이전의 나는 가족과 엄마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기만을 바라고 변화하기를 거부하던 겁쟁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마음먹는 순간, 세상은 나에게 다른 이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생은 내리는 빗속에서 춤추는 것이라는 표현처럼, 축축하고 찝찝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빗물들이 감사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비에 젖어서 싫고 짜증 나는 것이 아니라, 비에 젖어도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비가 내려서 더 분위기 있는 날이 되었고, 비가 내려서 재즈음악 소리가 더 아름답게 들리고, 비가 내려서 지글지글 굽는 파전 소리가 더 맛있게 들렸다.


얼마 전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우비만 입은 채로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머리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나에게 반갑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걸은지 5분쯤 지나자 조금씩 젖어드는 운동화와 양말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젖은 운동화와 양말은 빨아서 말리면 되니까 문제 될 게 없었다. 이미 비를 맞겠다고 결심한 나는 비를 맞는 게 되려 즐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걷다 보니 이 세상에는 지나고 나면 괜찮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빗방울 중 하나가 되었고, 나의 슬픔도 나의 기쁨도 모두 흐르는 빗방울에 씻겨져 내려갔다. 그 자리엔 온전한 나만 남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리는 빗물 속에서 대만을 떠올렸다. 나의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대만을.












메인사진출처: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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