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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May 26. 2024

도로에서 난폭운전자를 만났을 때

고통의 유혹




며칠 전, 한낮기온이 30도를 웃돌았다. 뜨거운 햇볕아래 주차되어 있던 차를 타며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어휴, 5월인데 이렇게 더우면 올여름은 어쩌려나... 무섭다 무서워..."


내 말을 옆에서 듣고는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근데 오히려 좋은 점도 있어. 복숭아가 더 달콤하게 익을 거야. 난 여름에 복숭아 먹을 생각에 너무 기대돼. 딱딱한 복숭아 말고 물렁한 복숭아 먹고 싶어! 얼마나 향기롭고 달콤할까?"


딸아이의 솜사탕처럼 달콤한 말과 생각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쩌면 나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보다 더 많이 세상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완전하게 태어나서 세상의 변화와 어른들의 편견으로 인해서 불완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삭막하고 팍팍한 인생 속에서 아이들의 동심이 때때로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나의 태도와 생각을 전환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작은 사거리를 만난다. 해반천 길을 끼고 있는 이 사거리 맞은편에는 여러 개의 초등학교와 도서관이 있다. 그 반대쪽에는 파출소와 우체국, 소방서, 동사무소가 쭉 들어서있다. 아파트 단지 쪽 사거에는 들어오고 나가는 유동차량에 비해서 도로가 좁아서 인지  이곳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다툼이 자주 발생한다. 제는 직진과 우회전 차량 간의 기싸움이다.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곳이지만 반대쪽 차선보다 차선의 간격이 약간 넓어서 직진차량이 바짝 왼쪽으로 붙어 서주면 우회전 차량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다. 나 또한 이곳을 지나갈 때 가능하면 우회차량이 지나갈 수 있게 왼쪽으로 차선을 붙여서 신호를 기다리는 편이다. 그러나 그날은 앞쪽에 서있는 차가 이미 정중앙에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내가 왼쪽으로 붙인다고 해도 우회차량이 지나갈 수 없는 간격이었다. 뒤쪽에서는 앞의 이런 상황이 보이지 않았는지 경적을 무섭게 울려댔다.


'빵-- 빵빵빵---------------'


자동차 경적소리에 누가 들어도 '나 지금 엄청 화났다'라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놀란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왼쪽으로 붙여주었다. 경적을 울리던 차가 내 차 옆에 멈춰 창문을 내리고는 나에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무서워서 창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입모양만 봐도 상당히 불쾌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에게 욕을 해댔다. 순간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에서 내려서 한판 붙어버릴까 생각도 했다. 아니면 창문을 내리고 가운데 중지손가락이라도 올려 복수해주고 싶었다. 찰나의 순간에 몇 가지의 복수방법이 떠올랐지만 직진신호가 떨어졌고 내 앞에 서있던 차도 나에게 욕을 해댄 우회차량도 모두 각자 갈길을 갔다.


도서관에 가던 길이었던 나는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심호흡을 했다.


'씁--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차량번호라도 찍어둘걸 그랬나. 아니면 욕하는 모습을 동영상 촬영이라도 해둘걸 그랬나. 마음속 분노가 계속 일어났다. 저주의 말이라도 퍼부어줄걸 며 못 뱉은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야 이 못된 인간아! 그렇게 빨리 가야 되면 집에서 좀 더 빨리 출발하지 그랬어!!! 늦어봐야 1~2분 상간인데 뭐가 그렇게 팍팍하냐?! 나중에 너보다 더한 인간 만나서 더 심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차선이 하나인 차로에서 직진차량이 우회차량을 위해 길을 비켜줘야 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결과는 비켜줄 수 있는 상황이면 해줘도 되지만, 무리하게 비켜줄 필요는 없다고 한다. 직진차량이 안 비켜준다는 이유로 경적을 크게 울리거나 난폭운전을 하는 경우 500만 원의 벌금 및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내가 겪은 상황이 법적으로 어떠한지 알고 나니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상대방 운전자가 나에게 욕을 해댈 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 분노를 상대와 똑같이 맞대응했다면 오히려 더 마음을 진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서관에 들어가 반납하려고 들고 온 공지영작가의 산문책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펼쳤다. 다 읽었지만 다시 한번 훑어보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마음이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스르륵 펼친 책의 한 구절이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고통은 유혹이다.  p.242

고통은 몇 가지 특별한 해악을 우리에게 끼친다. 고통은 사실 '가만히 두면 원래는 착하고 평범하다.'라고 주장하는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해 간다.

고통은 첫째로 우리에게 악심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판단하게 만든다.
세 번째로 고통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며 사랑을 방해한다.

반대로 고통에는 이점도 있다. 고통은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고통이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두 번째로 고통이 주는 이점은 겸손이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자기 비하로 연결 짓지 않게 관리하면 '성숙'이라는 이점이 따라온다.

공지영,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중에서




위의 내용은 저자의 책 내용을 간추려 다시 정리한 내용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겪은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전 내가 겪은 난폭운전자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 순간 내 마음의 고통이 나에게 악심을 불러일으켰다. 생각뿐이었지만 상대 운전자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그 찰나의 순간으로 그 운전자를 판단했다. '여유 없고 몰상식하고 괴팍한 아저씨'라고 말이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참지 못하고 상대운전자와 맞서 싸우기라도 했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책 한 구절로 벗어나기에 힘들 만큼 더 큰 여파와 고통을 경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속 분노와 고통이 제일 크다는 괴로움으로 인해 내마음속 사랑이 방해받지 않았을까.


사실 이번일로 인해 나의 고통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완벽하고자 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로 인해 누군가 나를 나무라거나 질책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싫은 소리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완벽하려고 애쓴다. 그 또한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의 자만이었다. 그로 인해 나에게 고통을 부여함으로써 겸손을 배우게 한다. '나는 한낱 실수투성이 인간에 불과해'라는 자기 비하를 무한반복하고 나면 끝이 없는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랑의 힘으로 늪에서 빠져나오고는 한다. 고통을 통해서 배운 겸손으로 조금씩 '성숙'해져 감을 느낀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도 복숭아의 달콤함을 떠올릴 수 있는  생각과 태도를 여덟 살 딸아이게서 배워간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흘려보낼 줄도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내가 신이기를 바라는 오만함이라는 것을 고통을 통해 조금씩 배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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