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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May 12. 2024

어쩌다 발견한 하루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매일 아침 수영장 가는 길은 참 즐겁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조금 돌아가는 길은 나무들이 많아서 좋고, 빨리 가는 길에는 유치원이 있어서 아침 등원길의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어느 순간부터 걷는 행위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속에서 높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 같을 때에도 땅을 밟으며 걷고 나면 어느새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해졌다.  혼자인 것이 지독히 외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지난날들에 비하면 지금은 홀로 걷는 이 순간들이 나에게 자유로움으로 각인된 듯하다.








신랑이 장기출장을 가게 되면서 요즘은 차를 타고 수영장에 간다.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우리 수영장은 주차장이 아주 넓다. 시민체육시설답게 수영장 건물 맞은편에는 야구장도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엔 등산객들로 드넓은 주차장이 꽉 차기도 하고, 행사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올라가는 입구까지 차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그래서 차를 갖고 오게 되는 날이면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바로 수영장에 온다. 일찍 오면 주차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수영 수업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은 시간은 나에게 고요의 시간이다. 등산로를 따라 걷기도 하고, 야구장에서 훈련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한잔 마시기도 한다.


하루는  주차장 맨 안쪽 하얀색 건물이 궁금해서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하얀색 건물은 야구부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듯했다. 건물 옆쪽으로 걷다 작은 숲길이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봄과 여름의 기로에서 아침 기온은 쌀쌀하게 느껴졌다. 전날 내린 비로 수풀냄새가 그득했고 땅은 아직 촉촉이 젖어있었다. 맑은 하늘과 초록빛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이 비췄다. 눈을 감은채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었다. 새들이 짹짹 인다. 기분 좋은 살랑바람이 불어와 나의 두 볼을 어루만져주었다.


'오늘 나의 행복은 이것으로 충분하겠다.'


어쩌다 발견한 것들은 나의 하루를 충만하게 해 준다. 어쩌다 발견한 비밀의 숲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발견하기 전까지 나에게 어떤 의미도 없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하루 속으로 불쑥 들어와 자리 잡고는 한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는 대형서점이 없다. 작은 동네 책방이 두세 개 있긴 하지만 서점보다는  딸아이의 학교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에 자주 가게 된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엔 아침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딸아이가 마치기 전까지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서점과 또 다른 구경을 하는 재미가 있다. 매주 테마가 바뀌어가며 전시되는 '도서관에서만 읽는 책'들을 둘러보고 있으면 세상사람들이 요즘 하는 생각들을 엿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발길이 멈추어지는 그런 책들이 있다. 책 제목에 이끌려서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서이기도 하다. 읽고 싶었던 책을 메모해 뒀다 대출해 읽는 것도 좋지만, 어쩌다 발견한, 나의 발길이 멈추어지는 그런 책들을 만난 날이면 기분이 렌다.


얼마 전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들을 둘러보다 공지영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라는 책 앞에 멈추었다. 제목만 보았다면 이 책에 이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지영 작가의 이름이 나로 하여금 멈추어 서게 만들었다. 무슨 내용의 산문일까. 책장을 스르륵 훑다 한 페이지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공지영 산문,<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고요'라는 단어의 이끌림으로 한참을 저 페이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따금 생각하게 된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유명인이 추천한 책, 공신력 있는 기관들의 추천도서등 좋은 책을 고르는 데 있어 여러 조건들이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좋은 책이란 지금 나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어 하나에서 위안을 받기도, 문장 한 줄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 그런 책. 읽을수록 불안하고 버거워지는 문장들로 가득한 책 말고,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그런 책이  좋다.


집으로 빌려온 공지영 작가의 이 책을 나는 그냥 쉬이 읽어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고기를 읽고 대성통곡한 이후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려본 건  20년 만이었다.  한 장 한 장,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이 책을 만나게 된 나의 하루에게, 이 책 앞에서 멈추어 선 나의 발걸음에 감사했다.


삶이 힘들고 지루해지는 순간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간다는 무료함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어쩌다 발견한 것들에 눈길을 돌리면 분명 같은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제와 다른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어제와 똑같이 흘러가는 이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특별한 하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처음을 맛보며 살아간다.


오늘이라는 '처음'.


매일을 처음처럼 살아간다면 어쩌다 발견한 작고 소중한 것들에 설렘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다 발견한 비밀의 숲 속에서도, 어쩌다 발견한 좋은 책 속에서도 나는 고요하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들이 아님을 이제는 알 것 같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나만의 고요함.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의 처음들을 발견하고 맛보며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쫒기듯 살아가는 하루말고, 행복하기 위해 오늘을 처음처럼 살아가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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