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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Apr 28. 2024

코로나19가 나에게 남긴 것

나의 시간을 살아가기를




코로나19가 발생하고 7개월쯤 뒤 우리 세 식구 모두가 동시 확진 되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신랑이었다. 단순 감기 몸살인 줄 알았으나, 일반 감기와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프고 딸아이도 고열이 나기 시작하자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우리 모두 동시 확진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따로 걸려서 격리하고 고생하느니 셋이 같이 집에 격리되면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처방받은 해열제와 진통제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하고 신랑이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평소 건강한 체질이고 감기에 걸려도 잘 먹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회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나마 나는 증상이 좀 늦게 나타나서 딸아이와 신랑을 간병해 줄 수 있었다. 신랑은 누군가에게 밤새 온몸을 두들겨 맞은 기분이라고 했다. 차가운 물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 알아서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딸아이는 열이 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다른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거짓말처럼 딱 3일이 지나자 열이 잡혔다. 딸아이는 컨디션도 좋고 밥도 잘 먹었다. 신랑도 3일 정도 지나니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신랑과 딸아이가 괜찮아지자 나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주어졌다. 귀옆쪽을 누가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통증을 시작으로 침을 삼킬 수도 없을 만큼 괴로운 목 통증이 시작되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숨 쉬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진통제의 힘을 빌려 잠을 잤다. 우리 세 가족의 동시 격리가 모두를 예민하게 만들 때쯤 7일의 격리기간이 끝났다. 마치 한바탕 폭풍우를 겪은듯한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나의 몸뚱이가 코로나 19를 이겨낸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나에게 코로나19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가슴과 명치 그 사이 어디쯤인가를 무거운 돌덩이로 계속 누르는 것 같은 답답함이 지속되었다. 자다가도 호흡이 불편해 몇 번을 벌떡벌떡 일어났다. 마치 가위눌림을 당한 것처럼.


째깍째깍.


밤이 다가오면 잠이 드는 게 무서워지면서 똑같이 반복되는 시계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기 시작했다. 딸아이와 신랑이 깊이 잠든 밤 멀뚱멀뚱 잠에 들지 못해 계속 눈만 감고 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아직 새벽 2시밖에 안 되었나...'

3시 40분.

'아... 한 시간 40분밖에 더 못 잤나...'

5시 20분. 딸아이가 뒤척이며 일어났다.

"엄마, 쉬 마려워..."


"응... 그래 쉬하러 가자..."

그렇게 더디고 더딘 시간이 흘러 아주 잠깐 잠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아침 등원시간이었다. 8시 22분 아이를 등원버스에 태워 보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왔다. 덥고 습한 날씨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누웠다. 머리가 아파왔다. 나에게는 두통이 오기 전 전조증상 같은 게 있다. 눈이 흐릿해지면서 초점이 잘 안 맞고 시야가 뿌옇게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 눈썹뼈를 시작으로 어마무시한 두통이 몰려온다. 코로나를 앓으면 아팠던 곳은 한 번씩 다 아프다고 하더니 그래서 이런 건가 하고 진통제를 한 알 먹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것 같은데 심장이 요동쳤다. 아이를 하원버스에서 놓쳐 길거리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꿈을 꿨다. 다행히 내가 맞춰놓은 알람시간 전에 잠을 깼고 아직 시간은 점심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꾸역꾸역 점심을 챙겨 먹었다. 있는 국을 데워 밥을 말아 한 숟갈 입에 욱여넣었다. 예능프로그램 하나를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멍하니 밥말은 국을 입에 마저 넣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잠시 걸으러라도 나갈까'

몸이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다리하나를 들어 올리는데 깊은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커다란 괴물이 바닥에서 내 발을 잡아당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싶었다.


'이대로 영원히 어둡고 깜깜한 우물 속에 갇힌 것 같이 살아가게 되면 어쩌지...'


'내 몸 구석구석 하나둘 이렇게 병들어 그냥 늙어버리면 어쩌지... '

어둡고 캄캄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이의 하원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는 여느 때처럼 활기 넘쳤고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해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까르르 웃어댔고 나는 입꼬리조차 올릴 힘이 없었지만 아이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웃으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신랑이 돌아오는 시간만 기다려졌다.


째깍째깍.

잠들어야 하는 밤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다. 어두운 밤이 다가와 또다시 잠을 못 이룰까 두려웠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어두운 밤을 또 나 혼자 지새워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아무것도 할 수없이 베란다 창문 밖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 잠든 이 밤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눈을 감고 잠시 칠흑 같은 우주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좀 나을까 하는 기대로 눈을 감았다 떴다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했다. 또 그런 아침이 밝아왔다.

그럼에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에게 보이지 않는 시간은 고통스럽게 흘러갔고, 보이는 시간은 두에게 공평하다는 듯 째깍째깍 소리만 남겼다.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쇼펜하우어-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나를 꺼내어준 것일까.


지금에 와서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아주 찰나처럼 짧게 느껴진다. 그러나 코로나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그 시간 속에서의 나는 아마 영원처럼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나는 광각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마치 그 순간만큼은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던 게 아닐까.


영원처럼 힘들게 느껴지는 고통의 순간도 어느 순간에는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그러니 타인의 시간을 살기보다, 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기를.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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