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으로 유학 가기 전 한국에서 2년간 다닌 대학교에서 주최한 스피치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비교적 내향형에 속하는 나는 어떤 대회에 자진해서 참가하거나 학교에서 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공 교수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큰 마음먹고 스피치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화구연, 웅변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나는 사실 대회에 나가는 것 자체에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 한편에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열정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선생님이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어떤 물건을 소개하는 쇼호스트가 되기도, 외국어로 유창하게 방송을 하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중국어를 배운 지 1년도 채 안된 내가 과연중국어로 스피치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잘 해내고 싶었다. 나를 믿어준 교수님께 보답하고 싶었고, 남들보다 늦게 들어온 대학이지만 잘하고 있다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의 스피치 주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 A4용지 한 장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이 내용을 중국어로 바꾸어 말하려고 생각하니 아주 길고 버겁게 느껴졌다. 교수님께 부탁해 스피치 내용의 중국어 발음을 녹음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면서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무엇인가에 몰입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결과 나는 스피치 대회에서 대상을 타게 되었고, 이 경험은 스스로에게 정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을 믿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경험으로써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늘 아름다움을 갈망했다. 그 당시 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단순히 생각했다. 미(美)적으로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면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정작 아름다움에 대해 그토록 갈망했던 이유는 사물, 현상, 자연, 상황 등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한다.
그 시간 속에 있던 나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대만유학생활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워나간 것 같다.
즐거움의 한가운데 서있을 때 즐거움을 찾는 건 아주 쉽다. 그러나 고통의 한가운데 서있을 때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만에서 지낸 지 3개월쯤 지났을까. 언어중심 선생님께서 국제학생들을 대상으로 로터리 클럽에서 개최하는 스피치 대회가 열린다고 안내해 주셨다. 스피치 대회라는 말에 눈이 번쩍했다. 다시 한번 그때 느꼈던 몰입감을 나에게 제공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신청했다. 떨리긴 했지만 좀 더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옷을 입고 오면 가산점이 부여된다기에 한복을 공수해 입고 스피치 대회에 나갔다. 순위에 입상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아름다운 복장상을 받게 되었다.스피치 대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대만 TV매체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아마도 의상이 튀어서였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중국어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나에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타이베이는 나에게 아름다움 그 자체인 도시이다. 아마도 내가 지금 이토록 대만을 그리워하며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 시절,그곳에서 경험했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습도가 90% 이상인 날씨가 지속되는 나라. 1년 중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는 나라. 더위에 습도가 더해져 너무나 무더운 나라. 태풍과 지진이 자주 오는 나라. 기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악조건 속에서도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자연경관이나 건축물들은 아름다웠다. 덥고 습한 날씨에 버스를 기다리는 줄을 설 때에도, 버블티를 사려고 줄을 서있을 때에도, 출퇴근 시간 붐비는 경전철역에서도 늘 질서 정연했으며 온화했다. 덥고 습하다고, 비가 많이 온다고, 줄을 길게 서있다고, 느리다고, 불평하기보다 그 속에서 여유를 찾고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았다.
타이베이 도시철도인 MRT 딴수이(淡水)- 신이(信義) 선의 마지막 종착역인 딴수이는 내가 사랑했던 타이베이의 아름다움에 낭만까지 더해진 곳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노을이 질 시간쯤에 맞추어 딴수이 역으로 향하고는 했다.
나는 늘 바다를 사랑했고 물을 사랑했다. 물을 보고 있으면 내가 지금 있는 곳과 아주 먼 곳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딴수이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지로도 유명하고 석양이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딴수이 라오제(老街)라는 야시장 비슷한 먹자골목도 있으며, 스페인 식민시절 요새로 지어졌던 홍마오청(紅毛城) 건물과, 유람선을 타고 강을 건너면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석양. 그리고 강물에 비친 달빛까지. 지금 생각해도 딴수이의 모습은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딴수이가 타이베이의 북쪽 끝이라면 타이베이의 남쪽 끝 신베이시(新北市)에는 비탄(碧潭)이 있다. 이곳도 MRT를 타고 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인데, 내가 너무나도 애정했던 타이베이의 아름다운 곳이다. 푸른빛이 감도는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비탄은 대만 드라마 <장난스러운 키스>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이 호수를 가로지르는 200M의 흔들리는 다리는 저녁이 되면 반짝거리는 불빛들로 더 아름다워진다. 비탄은 호수 한쪽으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해질녘 이곳에 앉아서 마시는 지파이와 맥주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고, 호수를 따라 쭉 줄지어 있는 식당가도 있어서 호수를 보며 식사를 하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타이베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이곳들은 대학교 학위를 받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내 마음속 압박감으로부터 잠시 도망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딴수이 속에서 잠시 노을을 보며 멈춰 설 수 있는 날들이 있었기에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비탄의 여유로움을 바라보며 나를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기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즐기고 있었다. 경험을 통해서 따라오는 불안, 초조, 절망, 좌절, 기쁨, 행복, 고통의 한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름다움은 비단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 그리고 영혼까지 감동시키는 경험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고통, 불안, 분노, 절망, 좌절, 기쁨, 행복이 모두 얽히고설켜 아름다움이라는 결정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불완전함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