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이 바뀐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나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타국생활에 적응함에 있어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대만에 도착해 제일 처음 터전으로 잡은 산 등성이 위의 국제 기숙사에서 3개월을 지냈다. 학교와 거리가 있는 곳이다 보니 통학하기도 불편했고, 대만의 무덥고 습한 날씨에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다니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서 국제 기숙사 방값과 비슷한 금액의 방을 학교 근처에 구하기로 결심했다.
언어중심이 있던 정치대학교는 무자(木柵)라는 동네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타이베이 시에서도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학교 근처에 타이베이 동물원이 있는 곳이었다. 지내던 국제 기숙사와 비슷한 가격대의 방을 학교 근처로 알아보던 중 운 좋게 학교 정문 앞 새로 리모델링한 방을 저렴한 가격에 구하게 되었다. 방안에 화장실도 있었고, 한쪽 벽면이 모두 통창으로 되어있어 초록초록한 산이 보이는 경치도 훌륭했다. 주인 할머니도 인심 좋고 친절하신 분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대만에서 지내는 나만의 터전이 생긴 것 같았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첫 학기였던 여름학기가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다. 다행히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학기 등록금은 해결한 것이다. 일주일정도의 짧은 방학기간을 끝내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가을학기(9월~11월)라고 표현하지만 대만의 가을은 우리나라의 가을과 달랐다. 비가 더 많이 오고 태풍도 많이 오는 우기(雨期)에 가까운 계절이었다. (11월이 그나마 날씨가 대체적으로 좋다.) 문제는 습도였다. 우리나라처럼 춥지는 않지만 습도가 90% 이상 지속되다 보니 비가 오거나 햇빛이 없을 때에는 으슬으슬한 추위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게다가 내가 있는 곳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운무가 계속 끼어있거나 흐린 날이 많았다.
새로 구한 방으로 이사를 오고 한 달쯤 지났을까. 새벽 3시 33분만 되면 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자다 악몽을 꾸기도 했고, 가위에 눌리는듯한 무서움을 느끼다 벌떡 일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3시 33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 무서워서 새벽에 깨어나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일부러 낮에 몸을 피곤하게 혹사시켜보기도 했다. 잠들기 전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김없이 새벽에 깨어났다. 나중에는 도수 높은 보드카를 마시고 잠에 들어보아도 변함없었다. 그렇게 새벽에 잠에서 깨면 무서움에 다시 잠자리에 들기가 어려웠다. 아침 해가 뜨는 걸 보고 잠깐 잠에 들기는 했지만 이내 아침 알람이 울리고는 했다. 그러기를 세 달 가까이 반복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시든 상추처럼 힘없이 축 쳐져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걷는 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걸을 때마다 아랫배 안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챙겨 온 비상약을 먹기는 했지만 갈수록 통증은 심해져 갔다. 대만에 오기 전 골반염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기에 다시 골반염이 재발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다 학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랫배 통증으로 길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학교 근처 병원으로 가니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고 했다.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데...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순간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달했다. 엄마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어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부인과를 잘 본다는 병원을 수소문해서 진료예약을 하셨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수술날짜를 잡아야 했다. 난소에 생긴 낭종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하복부 불편감과 압박감을 유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왼쪽 난소에 9센티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낭종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26살이었던 나에게 의사 선생님께서는 난소 조직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로봇 수술을 권유하셨다.
수술당일 수술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로 가는 병원 복도 위 천장의 불빛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심각한 병도 아니고, 그냥 난소에 있는 혹만 제거하면 되는 수술인데도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술대 위로 옮겨진 나는 머리 위로 우주선 같은 동그랗고 커다란 불빛을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내 주위로 로봇팔처럼 생긴 여러 개의 기계가 둘러싸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 이름과 혈액형을 확인했다. 차갑고 무서운 분위기에 심장이 요동치듯 뛰었지만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나자 생각했다. 정말 눈을 감았다 뜬것 같은데 나는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미칠듯한 복부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뱃속에 두 팔을 넣어 모든 장기들을 끄집어내었다가 다시 넣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그렇게 수술 후 3일간 입원 후에 퇴원하게 되었다. 담당의 선생님께서는 수술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비행기를 타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부산으로 내려와 며칠간 집에서 요양하고 일주일 뒤 대만으로 다시 돌아갔다.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 같지 않아 힘들었지만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온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한국에서 캐리어 한가득 비상식량을 채워 대만으로 돌아갔다. 대만공항에 도착한 나는 수하물 벨트에서 나오는 20킬로짜리 캐리어를 생각 없이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배에서 '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설마 수술부위가 찢어진 건가?'
놀란마음에 공항 화장실로 들어가 반창고를 떼고 환부를 확인했다. 복부에 총 5군데 구멍을 냈는데 그중 오른쪽 아랫배 부분의 구멍이 벌어져있었다. 아래 지방층은 삭는 실로 봉합하고 상처가 남지 않게 하기 위해 위쪽 피부에는 본드 같은 걸로 봉합해 두었는데 내가 힘을 쓰는 바람에 본드로 붙여둔 부분이 벌어진 것이었다. 벌어진 환부 사이로 낚싯바늘 같은 실이 삐죽 튀어나왔다. 잡아당겨보니 시멘트 안에 갇힌 채 굳어버린 것처럼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오른쪽 아랫배에 삐죽 튀어나온 하얀 수염과 함께 다녔다. 대만 집으로 돌아와 약국에서 사 온 소독약으로 드레싱을 한 후 반창고로 조심스레 흰실을 숨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싶다. 수업 며칠 좀 빠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지냈다면 아프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멈추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아프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대만은 원래 습한 나라여서 여자들에게 좋은 기후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대만여자들은 항상 음식을 먹고 나면 따뜻하고 미지근한 물이나 차를 마신다고 했다. 습기에 차가운 기운이 더해지면 얼어버리는 것처럼 우리 몸도 그렇다고 한다. 위도 안 좋아서 소화도 잘 안 되는 나는 덥다는 이유로 매일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차가운 물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니 안 그래도 난소 쪽 질환이 있던 나에게 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소낭종 제거 수술 이후에도 호르몬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데 나는 1년간 호르몬 약을 처방받아서 복용했다. 생리를 안 해서 편하기는 했지만 몸이 붓고 가슴이 조이는듯한 부작용을 겪었다. 여러모로 예민한 나는 대만에서 적응하기 위해 나름의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그 뒤로 가능하면 따뜻한 차를 마시고 배를 따뜻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점차 새벽에 깨는 횟수도 줄어들고 수면의 질도 높아졌다. 역시 사람은 고통을 겪어봐야 깨닫는 존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