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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카 친구 Aug 30. 2021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고양이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작년 가을에 유기견보호센터 웹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요즘은 강아지를 구매하지 않고 보호소에서 데려온다기에 궁금했을 뿐이었다. 사진 속 강아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강아지 키울 계획이 없었는데, 이를 어쩌나.' 혹시 폐가 될까 봐 전셋집 주인, 관리사무소, 아래층 주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음 날 강아지를 데려왔다. 지금은 방석에 배를 뒤집고 누워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살면서 잘한 일이 별로 없더라도, 적어도 생명 하나를 구했어.'


강아지는 자신의 의미를 모른다. 사람의 의지로 버려지고, 잡히고, 죽을 날을 받고, 옮겨지고, 사랑받고 있을 뿐이다.


지난달 법무부에서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동물은 여전히 소유의 대상이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도축의 대상이고, 사람이 아닌데, 물건도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러다 우리 집 강아지를 돌아보며 납득했다. 누군가 이 강아지를 해친다면, 남들은 물건이 상했으니 손괴죄를 물라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는 내 사람을 해친데 준하는 살인죄를 묻고 싶을 것이다. 동물이란 그 괴리 가운데 어딘가에 있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동물보호법도 있다. 조문마다 철학적인 의미가 있어, 법을 관장하는 농림축산식품부 동물복지정책과 여러분들과 차 한 잔 나누며 토론하고 싶을 정도다. 제1조를 보면 "동물의 생명 존중 등 국민의 정서를 기르고 사람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하니 근본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동물을 자원으로 취급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제2조를 보면, 보호 대상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로 한정하되 포유류만 아니라 양서류나 어류도 보호하고, "반려동물"을 구분하되 그 범위는 농림축산식품부 여러분들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위임하고 있다.


이 법률을 볼 때마다 영화 <존 윅>이 떠오른다. <존 윅>은 존 윅이라는 킬러가 자기 강아지를 죽인 갱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갱단 전부를 몰살시키는 이야기다. 듣기만 해서는 '뭘 그렇게까지' 싶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 강아지는 킬러의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선물이었고,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 힘을 냈던 착한 강아지였다고. 마치 그로써 90분에 걸친 살인행각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관객의 입장에서는 '귀여운 강아지 : 나쁜 인간 수십 명'의 등가교환이 가능하다고(심지어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감독들은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맞는 판단이었다.


실생활에서 그와 같은 사적 보복을 하지 말라는 것이 형법의 기원 아닌가. 동물보호법에 형사처벌 조항이 있는 것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울분을 달래는 의미도 있겠다.


모든 법이 그렇듯 동물에 대한 법에도 그 사회의 미덕과 죄악에 대한 판단이 반영되어 있다. 동물보호법도 동물을 맛있게 먹고 싶지만 한편으로 내 동물이 다치면 사람까지 해치고 싶은 모순된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왜 지금 이 사회에서 그 마음이 법에 닿을 정도로 강렬해진 것일까.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는 새롭지 않다. 동물도 운다. 자연의 질서에 대해 새삼 존중심이 생긴 것일까. 인간의 손으로 생명을 복제하는 시대에.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반면, 나라에는 돈이 많지만 내게는 집이 없어 아이 대신 동물을 키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대에 내 다음 생명으로 동물을 돌아보게 된 것일까.  



역사 속에는 그 모순을 쳐내고 극단적인 가치 선택을 한 사례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죽인 자는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랬다고 한다"는 것은 고대 이집트의 법전을 찾기가 어려워서이다. 고대 이집트라고 단순히 말하지만 그 자체로 삼천 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데 법이 없었을 리는 없다. 다만 법과 종교가 분리되기 이전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을 뿐인 듯하다. 함무라비 왕도 샤마쉬 신에게 법전을 받았다는데, 그와 같이 인간이 법을 '건네받기' 전, 신이 직접 판단을 내리던 시절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도 법전은 없지만 법을 상징하는 마아트 여신이 있었다.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은 들고 있지만 그녀의 사연은 불분명한 반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마아트 여신은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어엿한 역할이 있었다. 태양신 라의 딸로서 우주만물의 질서를 책임졌는데,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 정의요 이를 깨는 것이 죄라는 의미에서 질서의 여신이 법을 상징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벽화를 보면 여신이 새처럼 날개를 달고 있기도 한데, 단순히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를 넘는다. 사람이 죽고 나면 오시리스의 법정 앞에서 영혼을 저울에 달게 되는데, 영혼에 실린 죄의 무게가 마아트의 깃털보다 무거우면 그 영혼은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를 죽이는 것이 여신 보시기에 죽을 죄란 말인가. 왜? 귀여워서? 그럴 리가. 마아트 여신에게는 바스테트라는 자매가 있었다. 고양이 머리에 사람 몸으로 표현되는 바스테트는 아버지인 태양신 라가 하늘을 달릴 때 고양이 모습으로 그 곁을 지키곤 했다. 마아트 입장에서는 자매의 현신인 고양이를 해친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징을 해친 죄로 실제 사람을 벌하는 것이 가당한가. 그 또한 그럴 리가. 어떠한 상징에 그 사회가 부여한 가치를 무시한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기 쉽다.



고대 사람들이라고 비합리적 일리 없다. 종교는 자연의 힘에 대한 경외에서 출발했고, 자연은 놀랍도록 합리적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신의 뜻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려 한 고대인이 어떠한 상징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마련이다.


이집트는 나일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사막이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강물을 타고 영양분이 쌓인 흙에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그 수확물을 잘 저장해서 다음 해 범람을 기다리는 것이 고대 이집트인의 삶의 방식이었다. 이 질서를 깨는 것은 중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법을 따르지 않고 이 질서를 깨트리는 악한 동물이 바로 쥐였다. 지중해 일대 전체의 곡창지대이기로 구약성경에도 히브리인이 곡식을 찾아갔다고 적혀 있는 이집트에서, 곡식을 갉아먹다니!


고대 이집트인에게 고양이는 목숨줄이 걸린 곡식창고를 침범하는 쥐를 알아서 잡아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사막에서 만나는 뱀까지 용감하게 공격하는 수호자였다. 게다가 귀엽기까지. 가정마다 고양이를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고양이는 삼천 년 전에 "반려동물"이 되었다. 고양이를 소중히 하는 마음이 쌓여, 고양이는 그 자체로 신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는 행복한 가정을 상징하는 여신이었다.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를 섬기는 도시의 축제도 너무나 행복했다고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전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자연의 질서와 가정의 평화와 국가경제를 파괴하는 중죄였던 것이다. 단순히 귀여운 동물 하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신으로 취급하지 않는 고대 사회도 동물을 보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물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잘 관찰하다 보면 인간과 유사한 풍부한 감정을 볼 수 있다. 심심하면 놀고 싶고, 새끼들을 먼저 먹이고, 고통을 무서워하는. 철없이 자라다 스스로 생계를 꾸리다 자식을 낳아 기르다 약해져서 잠드는 생로병사도 인간이 겪는 바와 같다.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소가 멋대로 사람을 받았을 때 책임을 묻지 말라 했다. 난폭한 소를 단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배상책임을 묻지만, 소를 도살하라는 말은 없다. 유대교의 모세 5경을 보면 사람을 받아 죽인 소를 돌로 쳐 죽이라는 한편, 적어도 엄마 소의 젖으로 송아지를 요리하지 말라 한다.


동물은 자신의 법적 의미를 모른다. 사람의 의지로 동물의 지위를 정할 뿐이다.


이제 상상해 보자.


따뜻한 지중해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이집트의 문을 여는 항구 알렉산드리아가 나타난다. 나일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막과 같은 햇빛 색의 신전들이 위용을 드러내고, 강 동편에 있는 부바스티스라는 도시에 다다른다. 일 년에 한 번, 온 도시에 와인이 흐른다는 축제의 장이다. 남자들은 연꽃잎 피리를 불고 여자들은 작은 심벌즈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그들이 춤을 추며 향하는 곳은 여신 바스테트의 신전이다. 그 신상 아래서 콧등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다. 도시 외곽에 사는 밀밭에서 농부 가족과 사는 고양이지만 낮에는 도시의 주인처럼 신전 앞을 거닐곤 한다. 그런데 어둠을 틈타 어느 청년이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가만히 몸을 말고 잠든 고양이를 단번에 죽인다.


이 청년에게는 어떠한 벌이 합당한가.


참고자료

"Cats in ancient Egypt, " Wikipedia (accessed August 29, 2021)

"Ancient Egyptian Law, " Joshua J. Mark, World History Encyclopedia (published October 2, 2017)

 "Egyptian law, " Encyclopedia Britannica (edited December 15, 2011)


커버: Photo by Mathieu Od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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