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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남미녀모친 Mar 24. 2024

고모가 돌아왔다. 30년 만에

  며칠 전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고모가 돌아가셨다고. 병원에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아빠가 다녀온지 이틀 만이라고 했다. 고모는 어제 고향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 묻혔다. 고모가 돌아온 건 30여년 만이다.



 

   어릴 적 고모를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엄마는 그분이 고모라고 했다. 고모는 단발 파마머리에 얼굴이 살짝 넓고 동그스름했다. 코가 오뚝했고 양볼이 통통하고 피부가 좋았다. 서울 억양을 썼는데, 말이 참 빨랐다.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모는 주로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학교 다니는 게 좋은 거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굉장히 장황하게 했다. 그러다 몇 달쯤 지난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니 고모가 없었다. 병원에 갔다고 했다. 갑자기 집에 온 게 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모가 아파서 급하게 어딜 갔다고 생각했다.


  몇 주 뒤 학교 끝나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고모였다.

"혹시 누가 찾아온 사람 없어요?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 있어요. 000 목사 아들인데 나한테 프러포즈한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집 근처에서 못 봤어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나 대신 엄마가 받았다.

"고모, 그런 남자 없었어요. 집에 인터폰도 안 울렸고요. 주소를 알면 찾아오겠죠. 누가 오면 고모한테 연락 줄게요."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계속 고모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찾았다.

"결혼비용으로 10억을 보냈다는데 혹시 오빠 받았어?, 000 이름으로 돈 들어왔는지 확인해 봐."

아빠가 전화를 받을 때면 아빠는 정신 차리라며 그런 사람 없다며, 누가 그 돈을 주냐며 화를 냈다. 무서운 아빠는 고모 전화를 받으면 예민해졌다. 그래서 나는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지금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오면 먼저 '여보세요' 하지 않는다. 그때 생긴 버릇이다. 누구인지 상대방의 목소리를 먼저 확인한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고모라고 생각되면 내용은 듣지 않고 엄마나 할머니 먼저 찾았다.


  고모는 시시 때때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내용은 점점 변했다.

"내 10억 어디 갔어요? 사람들이 그 돈 가지고 나한테 찾아온다고 했어요. 올케(엄마)가 숨긴 거 아니에요? 그 돈 차지하려고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죠? 나 여기 있다고 꼭 전해요. 계속 이런 식이면 나 가만히 안 있어요. 그 사람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자꾸 숨기는 거예요?"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주말 없이 한밤중에 오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고모의 전화는 받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나면서 나는 고모를 잊었다. 방학 때 집에 있을 때였다. 집전화가 울려서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저예요. 통장에 10억 입금했다는데 통장 확인해 봤어요?"

고모였다. 엄마와 목소리가 비슷한 나를 올케로 착각했다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대답을 했다.

"고모 저 @@예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집에 아무도 안 계세요."

"응 @@이니? 지금 몇 살이니?

"스물두 살이에요. 나중에 어른들 오시면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고모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엄마에게는 고모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알겠다고 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고모가 우리 집에 잠시 머물 때 모습이 생각났다. 고모는 요리를 하다 말고 뭔가를 찾으러 다녔다. 한 손에 식칼을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뒤졌다. 나는 집에서 공기 연습을 하다가 고모를 보며 '칼은 두고 찾아도 될 텐데'라고 생각했었다.



  고모는 집이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 집안에서 살림을 돕던 고모는 할머니가 서울에 일하러 간다는 이웃에게 같이 취직시켜 달라고 맡겼다고 했다. 서울에 간 고모는 취직을 해서 잘 사는 것 같았다고 엄마는 기억했다. 둘째를 낳은 엄마가 가난한 살림에 아파도 고기 한번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을 때 고모는 예쁜 구두를 신고 고급스러운 가방에 양장을 차려입고 집에 왔었다고 했다. 엄마가 기억하는 고모는 세련되고 말을 잘하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고 한다. 어딘가에 들어가 일도 다니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서울에 가서 고모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부모님은 때때로 고모의 병원에 다녀오셨다. 갈 때마다 고모가 좋아하는 엄마표 김밥도 싸가고 명절 때면 제사 음식도 싸가고 갈 때마다 용돈도 챙겨주고 바람도 쐬고 온다고 했다. 내가 고모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을 때였다. 고모의 병원에 다녀온 엄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한스런 이야기를 하시며 많이 우셨다. 가난하고 못 배운 데다 일찍 부모와 떨어져 살다 평범한 것 하나 편하게 누리지 못한 고모가 불쌍하다고 하셨다.


   며칠 전 아버지는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몸이 약해진 여동생을 만나고 왔다. 병원에 다녀온 날 아버지는 감당하지도 못할 술을 드시며 서럽게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뒤 고모는 돌아가셨다. 고모의 장례에는 엄마와 아빠, 남동생이 함께 있었다. 선산이 고향에 있는데도 가까이 사는 친척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엄마가 음식을 준비하고 차례를 지냈고, 아빠와 동생이 고모가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고모는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 묻혔다. 고모의 장례를 치른 날은 마침 할아버지 제삿날이기도 했다.


  고모가 3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모를 아프게 한 기억들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치유되길 바란다.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누리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애도를 전해드리고 싶다. 고모, 다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잡고 같이 와요. 저도 뵈러 갈게요.


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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