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분간 슬플 예정 11

이를 닦는 것과 공황장애의 상관관계

2021년 3월 30일


어제는 기어이 수면제를 복용했다.

정신과 싸워 이겨야지, 약에 의존해서는 안 돼! 하며 4일을 버텼는데,, 

4일 잠 못 자니, 아후..

눈 밑 다크서클이 까맣다 못해, 퍼렇게 변하는 것이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일단 잠을 자야, 면역력이 생기고, 면역력이 생겨야 건강한 몸, 그래야 건강한 정신이려니, 스스로 위안하며 수면제를 먹었다.

근데, 수면제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참 효과가 좋다.

신기하다.

약 먹고, 10~20분 안에 여지없이 잠이 든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잤다 싶어 일어나는데, 여지없이 5시간~6시간이 흘러있다.

강제로 잠들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내 몸을 위한다면야….

나는 지금 약해져 있으니까, 나는 지금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괜찮아!

누가 그랬다.

술, 담배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들에라도 의존할 텐데, 그런 것을 안 하니, 맨 정신으로 온통 버텨내야 하니 더 힘들 거라고!

맞는 말이다.

술이라도 먹어서 정신이라도 잃으면 몸은 쓰리지만, 이렇게 슬프거나, 괴롭진 않을 텐데.. 드넓은 사막의 거센 모래폭풍을 천 쪼가리 하나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기분이다.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지만, 작은 모래들이 사정없이 맨 살을 잘게 잘게 찢어내고 있는 듯하다. 


밤이 되면, 세상이 조용하면 더 그런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술, 담배 없이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일어나서 이를 닦았다. (그러고 보니 칫솔이 엄청 낡았네)


칫솔을 붙들고, 치약을 짜 냈다.

거울을 보며 칫솔질을 시작했다. 

먼저 앞니의 위아래를 한 30번 정도? 아니다 40번 정도?

그 다음 난 오른손 잡이라서, 왼쪽이 쪽으로 칫솔의 방향을 튼다.

왼쪽 위 아랫니를 돌려가며 닦아낸다. 

끝났다 싶으면 이번엔 팔목을 돌려서 오른쪽 위 아랫니 차례이다.

좀 불편하다 싶지만, 내 오른쪽 위 아랫니도 소중하니까?

일부러 왼쪽 위 아랫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자세가 불편하니 더 신경을 써줘야 한다.

인생도 그렇다. 

불편하면, 부족하면 더 시간을 투자하고, 더 기다려주고, 더 아껴줄 일이다.

수학 실력이 부족할 때 그러하듯이,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그러하듯이,

대소변을 못 가리는 애완견에게 그러하듯이,

능력이 부족한 팀원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상대에게 그러하듯이,

먼저 기다려주고, 더 기다려 줄 일이다. 


다음은 안쪽 이들 차례다.

이번엔 순서가 사뭇 다르다.

이미 오른쪽에 칫솔이 가 있으니, 그 상태에서 칫솔을 안으로 넣어 아랫니를 털어내듯이 닦아낸다. 문지르면 안 된다.

그 다음은 중간 위 아랫니, 특히 아랫니에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 다음 왼쪽으로 이동!


그렇게 끝이 나면, 혓바닥도 닦아줘야 한다.

몸에서 독소가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혓바닥이라니, 구역질이 살짝 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닦기가 끝이 나면, 칫솔을 헹구고,

컵으로 물을 받아(물을 아낄 수 있다. 우울증인데 지구 걱정이라니…) 다섯 번은 헹궈야 입에서 치약 냄새가 남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칫솔질로 이에 남아있는 치약들을 다시 닦아준 후에, 입을 헹궈주면 끝!

입안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적어도 10분은 그 개운함, 상쾌함을 간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음 식사까지 적어도 찝찝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게 중요한 거다. 우울증에 걸려있으면, 모든 것이 불편하고, 귀찮고, 울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가 나를 찝찝하지 않게 해 준다면, 살짝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라도 작은 성공 하나를 맛보아야 한다.

작은 성공은 나를 괜찮은 사람, 계획하는 사람, 성취하는 사람으로 보게 해 준다.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말이겠다. 

나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 

계획하고, 도전하고, 성공하고, 성장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귀하게 여기겠는가?


이 하나 닦았다고, 우울증이 치료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10분은 개운할 것이고, 5~6시간은 찝찝하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우울증 환자들에겐 그렇게 짧은 시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닦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우울증에 걸리면,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고,

이는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를 닦는 것은 

‘나는 우울증에 걸려 있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사람이야!’라는 고양된 자기 인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내가 발견한 또 하나의 우울증 치료방법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 나가기!’


1.     이를 닦기

2.     이불을 개기

3.     신발장을 정리하기

4.     아침을 챙겨 먹기

5.     하루 한 명의 사람에게 안부 전화를 걸기

6.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기 등등


이런 묵묵한 버티기를 통해, 약간의 시간들 동안 우울증을 벗어날 체력을, 면역력을 키우게 될 것이다.

물론 당분간은 계속 우울하고, 슬플 예정이다.


#공황장애 #우울증 #작은 성공 #묵묵한 버티기

작가의 이전글 당분간 슬플 예정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