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운다
“여기 들어갈까?”
주차를 하고 2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커피와 맥주를 함께 파는 카페였다. 건물 입구 로비에는 성인 남자 키만 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었다. 전구가 나무 전체를 감싸고, 그 옆에는 생선을 든 흰 곰 인형 두 마리가 놓여 있다. 두 명의 여자가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최적의 각도를 찾고, 그 앵글에 자기 얼굴까지 담기 위해 포즈를 취한다. 12월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카페 안에 들어섰을 때는 테이블 세 개 정도만 차 있었는데, 나올 무렵에는 거의 만석이 되었다.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은, 연말이라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털어내고 있는 걸까. 흰머리를 베레모로 감싼 할아버지, 어색한 야구 모자를 눌러쓴 할머니,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처럼 서로를 다정히 쓰다듬는 커플의 모습도 보인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저들은 20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누구와 보낼지 고민할까.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과의 추억을 무엇으로 쌓을지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올겨울 여행 코스를 짜듯이.
나는 차를 가지고 왔으니 커피로 대신했고, 두 분 선배님은 맥주를 곁들였다. 등짝을 다 가릴 정도의 크기의 사각 쿠션에 몸을 붙이니, 그 편안함에 잠이 쏟아졌다. "너 자고 있니?"라는 선배님의 목소리가 산 너머에서 넘어오는 듯 들렸고, 나는 30분 정도를 꾸벅거렸다. 출장과 두 시간 정도의 운전으로 쌓인 피로 덕분이다. 한 선배님이 콜라겐이 가득한 안주를 건네며 “먹어봐!”라고 내게 권했다. 입안 가득 한 입 베어물고 나니, 잠이 달아났다.
"우리도 연말에 송년 모임 해야죠."
"그래야지."
"언제 할까?“
이렇게 흘러가는 대화에 눈꼬리가 올라갔다.
'엄마, 교사, 아내.'
나의 일상에 붙은 이름표다. 하지만 이 단어는 나의 역할을 강조하고, 진정한 ‘내’가 없다. 나는 글을 좋아하던 아이였고, 책을 가까이 두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어디로 갔을까. 아침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아이를 챙기고, 학교에 출근하면 8시간 동안 교사로 지낸다. 가끔 내가 지워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누가 챙겨야 하지?’
카페 오른쪽을 차지하는 책꽂이에 꽂힌 책들. 그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 대화를 조용히 듣다 보면 오래전 내 모습이 얼굴을 내민다.
'그래, 나는 책을 좋아하던 아이였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철학으로 만든 삶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스스로 지켜야 하고,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선. 나도 나만의 선 안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답답함을 느낄 때면, 그 울타리 밖을 내다본다.
'일탈'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꾼다.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그저 잠시 일상 속에서 숨을 고를 만큼의 거리를 두어 본다. 오히려 이런 과정에서 나를 찾게 된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바다를 찾거나, 집에서 끓인 된장찌개 대신 식당 사장님이 차려주시는 돼지국밥을 먹는 일. 접시에 담긴, 내 도마질이 빠진 양파 한 조각을 집어 들거나, 국밥 국물의 간을 새우젓으로 맞추는 소소한 동작들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이 정도의 낯섦과 여유는 나를 잠시나마 쉬게 하니까.
이런 일탈은 내 머리와 가슴을 채운 의무감을 덜어낸다. 이 가벼움으로 또 새로운 출발선에 다다른다. 하루하루는 이렇게 이어져서, 삶은 다양한 색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매순간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
이들이 있어서 내가 살아간다. 일일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그래도 돼?"라고 물을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열심히 살아왔으니 가끔은 그래도 돼."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 그래서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에 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속상한 일이 생겨도 ‘울면 안된다’라는 마음으로 눈물을 꾹 참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어른이니까 이런 노력은 줄었다. ‘산타라는 존재’는 이미 내 마음에서 사라진 걸까. 하지만 여전히 선물을 받고 싶다. 어느 누구라도 붙들고, ‘나 애썼으니’ 한 번 봐달라고 조르고 싶다. 12월이 되면 이 마음은 커진다.
2024년은 여느 해보다 길게 느껴졌다. 매일을 버텼고, 가족을 챙기면서 보냈다. 현실적인 상황이 나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그로 인해서 울고 또 웃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가. 내 기준으로 지혜로운 매일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엄마로, 교사로, 아내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힘에 부칠 때는 이불과 베개를 적셨다. 그때 흘리는 눈물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미소로 포장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아이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잠시나마 웃고 싶었다.
인간의 노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결과는 그냥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냥 감사한 마음을 더했다.
‘나보다 더 힘들게 버티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니 감사하자.’
이런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길고 짧은 목표에 도달하면서 또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품었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웃음으로. 그 하루들을 내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네 삶에 진실했니?'
연말, 특히 12월에는 상념이 많아진다. 올해는 산타에게 꼭 선물을 받고 싶다. 2024년 동안 내가 지켜낸 사람들과 버텨낸 순간들을 돌아본다. 그 시간을 지나온 나를 격려하고, 앞으로도 매년 잘해낼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저 무던하게, 묵묵히, 선하게 살아갈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