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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21. 2019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외국인

다른 말투와 억양으로 전하는 한 개의 위로

“XX야, 잠깐 자리로 와봐라.”


또 시작이다. 상사가 나를 찾는 소리다. 입사 1개월 차인 신입사원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사의 자리로 간다.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 내용은 이해했다는 뜻 아닌가. 너무 빠른 속도로 뱉어져 나오는 저 언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불안한 눈동자와 떨리는 손짓을 애써 감춘 채 ‘제1교시 부산 사투리 듣기 평가’에 참여한다. 매일 들어도 어색하기만 한 단어와 구성진 사투리가 한국어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생경하게 다가온다. 


“니 알아들었제?”


어디에서 들었는데 신입사원이 갖춰야 할 태도 중의 하나는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솔직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 나는 지금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장벽에서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미국인 제이슨이 상사 홍길동의 말을 이해 못한 것과 매한가지란 말이다. 당당해지자.


“다시 한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입사 초에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힌 것은 ‘언어’였다. ‘부산 말’도 하나의 다른 언어이기라도 한 건지 해외 취업한 것도 아닌데 구두 보고할 때, 전화로 업무를 처리할 때, 회의할 때, 동료와 이야기를 나눌 때 등 도사리고 있는 모든 순간이 ‘짠!’하고 듣기 평가의 장을 펼쳐놨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으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중대한 고민이었다.




출근해서 스트레스가 극심한 순간은 전화 업무를 할 때다. 부산 사투리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쇼미더머니』 출연자인 것만 같은 전화 상대방이 랩을 하듯이 요청사항을 늘어놓는다. 지금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내가 100% 다 알아들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틱틱거리듯이 던져지는 말투는 공격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눅이 든 채 나도 어렵사리 입을 연다. 이야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 허리는 도중에 잘린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고요? XX 씨 서울 사람이라 그런가? 말을 되게 빙빙 돌려서 하네.”




대학교 3학년에 교환학생으로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영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한 기간이 있었다. 유학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나 여러 영어 강사들이 입을 모아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그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고 갈 것’이었다. 대략적인 내용만 알아도 ‘아는 만큼 들린다’는 것이다. 2017년 4월의 나는 그때 생각을 하며 절망한다. 왜 아무도 내게 부산에 대해 공부하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점심시간에 팀 동료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떤다. 대화에 끼어보려고 동료 A에게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본다. 연산동에 있는 카페에 갔단다. 내가 아는 부산 지명이라고는 해운대와 서면이 다인데 연산동은 어디란 말인가. ‘연산동이 어디예요?’라고 물을 자신이 없다. 혼자서 튀는 서울 억양으로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 어디인지 알 것 같다는 듯이 애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차라리 묻지 말 걸’하고 후회한다.


갑자기 동료 B가 고등학교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는 C고를 졸업했는데 근처 D고가 여러 이유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나머지 동료들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동의한다. 다른 팀 직원 한 명이 D고 졸업생인데 나중에 한번 물어보자고 동료 B가 마저 이야기한다. 왠지 모를 민망함과 어색함에 쪼록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애꿎은 빨대만 만지작거린다.


오후에는 상사와 함께 거래처 미팅을 하는데 여기서도 나는 소외된다. 거래처 담당자가 지역 기업인 E기업에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서 얘기한다.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이제 상사는 지역지인 F신문에 오늘 실린 기사에 대해서 화제를 연다. 나는 E기업의 존재도 몰랐고 부산에는 F신문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 큰마음먹고 거래처 미팅에서 대화를 주도해보려고 했는데 오늘도 실패다. 꿀 먹은 벙어리를 자처해본다.




서울에서 온 신입사원의 하루는 벅차기만 하다. 업무만 생소해도 충분히 힘들 것 같은데 언어와 문화를 반도 알지 못한 채로 적응하는 것은 눈을 감고 곡예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명이 일부 꺼져 어둑어둑한 사무실에 돌아와서 지친 마음으로 업무를 마무리한다. 계속된 퀴즈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 하루가 어서 저물었으면 하는 마음이 한가득이다.


“니 집에 안 가나?”


뒤를 돌아봤다.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대리님이다. 그동안 지나치며 묵례는 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답하니 대리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일이 많나? 일이 어렵제?”


긍정도 부정도 못한 채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니 대리님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낸 조그만 사탕 하나를 내 책상에 두고는 말한다.


“나는 간데이. 밤이 어둡다. 대강 하고 집에 드가라. 지금 안 해도 다 어찌 될 끼다.”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겨우 익숙해진 회사 근처 정류장에서 141번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색깔과 모양새의 버스가 도착한다. 핸드폰으로 내가 타는 버스가 141번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한다. 다른 버스를 잘못 탔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미아가 됐던 기억이 머릿속에 맴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텅 빈 버스의 좌석 하나에 앉는다.


멍하니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불현듯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어 지도 앱을 켠다. 그리고는 검색한다.


연산동


‘연산역 근처네? 연산역이 어디인지 모르지 참. 교대역 근처에 있는 역인데, 이 교대는 내가 아는 그 서울교대는 아니겠지. 저 시청역의 시청도 내가 아는 그 시청 아닐 거고. 아 여기가 동래역이구나. 그 근처가 동래구고, 온천동도 있고. 더 가면 온천장역, 그 근처는 금정구 부곡동. 아… 역이랑 동이랑 구 이름이 다 따로 노네.’


속으로 중얼거리다 한숨을 푹 쉬고는 이내 핸드폰 화면을 끄고 핸드폰과 손을 함께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손가락에 간질간질 뭐가 걸린다. 아까 챙겼던 작은 사탕 하나. 사탕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생각한다.


‘그래, 지금 안 해도 다 어찌 되겠지 뭐.’


빠른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도, 속이 터지게 느린 속도로 빙빙 돌려 말해도, 연산동이 어디인지 몰라도, 혼자서 외국인처럼 표준어 억양을 구사해도, 부산의 고등학교나 지역 기업을 몰라도, 그래도 오늘 이해한 것이 하나는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사탕의 의미. 나와는 다른 말투와 억양으로 힘든 내 하루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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