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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21. 2019

프롤로그: 앨리스, 물약을 마실 준비가 되었니?

만 25년 인생에 타향살이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아가씨 사주에 역마살이 많은데?”


때는 2017년 3월 중순. 만 25년의 인생을 서울에서 보낸 내가 살면서 혼자 몇 번 가보지도 못한 부산으로 혼자 건너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변하기 1주일 전이었다. 당장 1주일 뒤면 나는 여행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갈 것이다. 집 앞 바다를 보며 출근하고 우스갯소리로 촌스럽다고 놀리곤 했던 지역 방언을 구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서울의 아가씨’로 변하기 전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신년 운세를 보러 갔다. 점술가가 한 말에 나는 희미한 웃음을 짓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역마살이 아니면 이게 웬일이랍니까.’라고 생각하며.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난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2016년 12월의 나는 이상적인 일과 이상적인 근무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며 취업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는 단순하고도 속 아픈 사실을 절감했다. 결국 이상적인 근무지를 포기했다. 물론 내가 포기한 이상 속 근무지는 ‘서울’이었고 타협한 현실의 근무지는 ‘부산’이었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만년 백수가 될 수도 있다.’는 자기 불신과 주변 시선에 등 떠밀리듯이 준비한 2016년 하반기 취업은 결국 한 줄의 메시지로 마무리됐다.


‘합격하셨습니다.’ 합격 통보를 받으면 대개 저 문구에서 눈길이 멈춘 채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묘한 표정으로 다음 문구를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추후 일정 및 내용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정중하고도 단호한 문구를 쓴 누군가를 상상하며 그 사람을 붙들고 묻고 싶었다.  “저기요. 안녕하세요? 분명 제 손으로 희망 근무지 칸에 ‘부산’으로 썼는데요. 제가 거기서 살아본 적도 없고 친구는커녕 지인 한 명도 없거든요? 앞으로 제 삶에 닥친 일정과 내용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서울 사람입니다만.


캥거루족은 모면했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좋은 회사에 합격했다는 작은 성취감에 젖었던 2017년 2월에는 약 한 달간 진행될 신입사원 교육에 참여했다. 계열사 입사 동기와 선배 등 수십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형식적인 웃음을 곁들인 자기소개를 나눠야 했고 그때마다 질문 하나가 항상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비웃고 비수를 꽂았다.


“그러면 원래 부산 사람이에요?”


호기심 반, 안부 반이 섞인 질문이 나에게는 순도 100%의 무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원래 부산 사람이 아니면 회사 하나 때문에 부산까지 이동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로 재해석되었다. 질문 하나로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자격지심이라는 뱀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일 처음으로 질문을 한 사람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웃음을 던져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변의 질은 향상됐으며, 50번쯤 답변했을 때는 로봇처럼 능숙하게 답변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뇨. 서울이 고향이고 학교도 서울에서 다녀서 가족과 친구들 다 서울에 있고요. 부산은 취직하면서 이번에 처음 내려가는 거예요.”


대답하고 난 후에 돌아오는 상대의 반응도 예상 가능했다.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한다. 

3, 2, 1…


“어머, 정말요? 힘들지 않겠어요?”


가족도 친구도 아닌 낯선 이의 진심이라고는 거의 담기지 않은 안부성 공감이 나에게는 매번 폭력으로 다가왔다. 말에 상처 받고 말을 하는 이의 표정이 생채기에 소금을 뿌렸다. 붕어빵을 양성하는 교육을 철저하게 따르고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 같은 삶의 경계선을 조금이라도 밟아본 적 없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외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 하나로 ‘선 너머의 사람’이 되었다. 선 안의 사람들이 나를 기이하게 보는 시선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친절함을 가장한 폭력에도 나는 담담했다. ‘적응하기 힘들지 않겠냐’, ‘외로워서 어떡하냐’, ‘가서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겠다’는 한국인 특유의 오지랖에도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된다’가 유일한 계획이었다. 당장 다음날 아침에 타지에서 눈을 뜨게 되어도 당황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했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한 달의 준비 기간 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매일매일 짐을 싸고, 성실히 회사 교육을 듣고, 여러 명의 지인들에게 하나둘 안녕을 고했다. 너스레를 떨 이유가 없었다.



2017년 3월 19일

그러면 나는 정말 괜찮았을까?


놀라우면서도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괜찮지 않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2017년 3월 19일. 맑은 봄날이었고, 첫 출근 전날이었으며, 세간살이와 함께 부산으로 이사 온 당일이었다.


잠깐 낮잠을 자고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각은 오후 2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턱 하고 내 목을 조였다. 나를 휘감는 정적을 떨쳐내려 집 밖을 나왔는데도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이따금 도로 위에서 달리는 차 소리만 들릴 뿐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버려진 도시에 덩그러니 버려진 한 명인 걸까.


갑자기 우울하게 구름이 낀 날씨에 내 마음도 생각의 구름으로 덩달아 흐려졌다. 텅 빈 고요함을 피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바다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끝이 보이지 않게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그 앞에서 나는 하나의 외딴섬이었다.


그제야 인정하게 됐다. 조금 있으면 나는 토끼굴 속으로 기어들어 가 물약을 먹고 몸집이 굉장히 작아지거나 커져서 세상에 맞지 않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된다.’고 되뇌었던 것은 불안으로 가득한 무의식을 꽁꽁 싸매기 위한 알량한 자기 최면이었다는 것을.


인생이 주는 새로운 관문의 문고리를 떨리는 손으로 잡았던 그날, 그 카페에서 나는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래라는 악마를 두려움 속에 상상했다. 이 문을 열면 나는 흰 토끼의 하녀가 될 수도 있었고, 동물들과 다과회를 할 수도 있었으며, 하트의 여왕을 독대할 수도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 겪는 새 출발은 하나의 공포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출발을 연고가 없는 외지에서 한다면 공포감은 배로 증가하게 된다. 그 후 2년의 세월과 함께한 내가 만약 2017년 3월 19일의 나를 송정해수욕장 앞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곧 하게 될 타향살이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마. 아, 그렇다고 해서 잘 될 거라는 망상도 말고. 얄팍한 희망은 크게 도움 안되더라. 왜냐면 그게 위로를 위한 위로일 뿐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더라고. 그래도 넌 이제 큰 성장을 겪을 거야. 봄이 되기 전 목련 나무에 꽃봉오리가 한껏 움틀 준비를 하듯 타향살이가 주는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쑥쑥 자랄 거라고. 기억의 상자에는 추억이라는 비디오테이프도 쌓일 거다? 울고만 싶었던 일들이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술 한잔에 웃어넘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로 자리할 거란 말이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인구 이동자 수는 총 729만 7천 명으로 인구 이동률이 14.2%에 달한다고 한다. 이동자의 40%가 주택, 23%가 가족, 21%가 직업을 이유로 타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나처럼 취직하면서 혹은 새로운 보금자리 때문에 살던 곳에서 내쫓겨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피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당장 내일 외딴섬 같은 곳에서 새 출발을 하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당신이라면, 지금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흘러가는 물결에 온몸을 내맡기고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나에게 닥칠 이 중대하고도 사소한 미래를 수용해보자. 3개월 뒤, 반년 뒤, 1년 뒤,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서야 지금 이 순간이 값진 인생을 위한 훌륭한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미래를 앞둔 이들의 지인이라면 제발, 어쭙잖은 위로는 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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