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간호사는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간호사가 아닐까?
대학을 졸업하기 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근무하고 박사과정을 거치신 한 젊은 교수님이 열정에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었다. 맞다. 간호사는 정말 똑똑해야 한다. 어쩌면 의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사 못지않게 공부를 많이 하고 다양한 환자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처치나 약물을 의사에게 Recommendation 하고 필요하지 않은 처방을 거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만큼 환자가 눈에 들어오고 의사의 처방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마련이므로 간호학과에서 배우는 간호지식뿐만이 아니라 병원에 근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지속해야 한다.
공부에 대한 중요성을 많은 간호사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이는 특히 신규 간호사에게 정말 곤욕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일을 쳐내기도 버겁고 아직 업무가 돌아가는 flow를 익히기도 벅찬 시기에 모르는 약과 처방 그리고 처음 보는 검사나 시술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나도 신규시절 공부를 많이 해갔다고 나름 의기양양하게 들어갔지만 처음 보는 질환들과 약물들을 보는 순간 다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병동으로 실습을 나오는 간호학생들에게 그냥 어영부영 실습시간만 때우지 말고 좋은 간호사가 되려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한다. 아직 환자를 제대로 맡기 전, 책임감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때 임상 실습현장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공부해두라고.
돌아보면 내가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시절, 실습학생에게 중요한 과제였던 각 과목별 컨퍼런스 준비 (실습일지 및 환자 케이스스터디 발표)를 다 준비해놓고 나면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했었다.
"선생님, 어떤 사람들은 내시경을 해서 ENBD를 하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PTBD를 꽂나요?"
(* ENBD 내시경적 비담도 배액술, PTBD 경피적 간담도 배액술)
"배액 되는 체액의 색을 어떻게 구분하나요?"
"저 검사에는 왜 Lt.arm에 20G 주사를 준비해야 하나요?"
아마 당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나는 은근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간호학생으로서 예측가능한 질문범위를 넘어서 전공서적 범위 밖 질문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로서는 간호사가 똑똑해야 한다는 걸 체감했었던 것 같다. 실습학생으로서 병동에 있다 보면 연차를 떠나서 정말 똑똑한 간호사가 누구인지, 내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차가 낮아도 내공이 탄실한 사람들을 보면 다른 동료에게 질문을 하거나 의사에게 notify를 하거나 환자 및 보호자들에게 설명을 하나 하는데도 차이가 난다. 그런 선생님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나중에 저 선생님처럼 해야지', '나는 저런 간호사는 되지 말아야지' 라며 거울삼아 다짐하곤 했다.
신규간호사가 되어 앞 뒤로 다른 선생님들과 근무를 주고받다 보면, 그들이 질문하는 수준이나 그들이 해놓고 간 일처리 방식을 보고도 내공을 파악할 수 있다. 아무리 신규라고 해도 혼이 날 때, 이 선생님이 감정만으로 혼을 내는 건지, 내가 마땅히 혼나야 할 것에 대해 혼을 내시는 건지 구분할 수 있어서 혼을 내는 선생님의 수준도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능하다. (좀 무서운 얘기 일 수 있지만..ㅎ)
내가 신규간호사 시절 어느 날은 한 선배 간호사에게 인계를 주다가 혼이 났었다.
"너! 내가 수액 line 이렇게 연결해두지 말랬지? 끝에 extension 부분은 따로 걸어 두란말이야 아깝잖아!"
실제로 환자에게 연결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끄트머리에 붙은 Extension 부분은 버려지게 되니 아깝게 버리지 말고 다른 환자에게 쓰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하던 방식과 다르면 어김없이 혼이 나는 것이 신규 및 저연차 간호사의 숙명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건설적인 부분에서 지적과 질문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환자가 복수를 2L나 뺐는데 Vital sign은 측정했니?"
"Amiodarone과 Adenosine의 차이는 뭐니?"
"A-line으로는 IV 투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Potassium 섞인 수액의 가능한 peripheral 농도와 central 농도가 어떻게 되니?"
"Central line 다른 lumen으로 수혈과 다른 수액을 같이 줘도 되는 건지 자료 찾아서 공부해 와."
이렇게 질문이나 지적 하나에도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질문들을 해주시면 아무리 날카롭게 말씀하셔도 그 선생님이 너무 멋져 보이고 감사하게 생각됐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그 선생님의 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느 간호사는 일하는 것에서만 혼을 내지만, 어느 간호사는 일하는 방식을 떠나 환자를 바라보는 시야와 깊이에 대해서 몸소 보여준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는 선생님들을 보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거기까지 바라볼 수 있는 거지? 와아’라며 감탄하곤 했다. 그들의 학문적 지식이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이있는 임상적 시야는 간호사로서 너무 본받고 싶었다. 선배들은 그런 지식들을 바탕으로 환자들의 상태를 재빠르게 캐치하고 환자가 어느 상황에 놓여있어도 침착하게 대처하며 적재적소에서 대응할 줄 알았다. 또한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그들도 새로운 약물이나 타과에 대한 생소한 처치들은 꼼꼼하게 분석하고 파악해서 자료들을 병동에 공유하면서 아래 연차 간호사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같은 고연차 선생님이어도 나를 건설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선생님을 더 동경하고 따랐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연차가 쌓이면 내공이 탄탄한 간호사가 되겠어!'라고 다짐하며 근무할 때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을 준비해서 병동에 자주 오는 환자들의 질환이나 처음 보는 약물들을 적어둔 다음, 퇴근 후 집에 가서 나도 선배들처럼 깊이 있게 환자를 파악하고 싶어서 질환의 원인, 치료, 간호뿐만 아니라 약의 효과, 기전, 부작용, 주의사항 등을 매일매일 노트에 적어 머릿속에 넣으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리고 유명 대학병원의 내과 매뉴얼들을 각각 구입해서 같은 질환 별로 치료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하곤 했다. 이것도 전부 그런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신규간호사 시절, 나는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간호사로 커왔고 그들이 현재 임상에 없어도 마음 한편엔 언제나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늘 있다.
간호사는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임상에서 알아야 할 지식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의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의사만큼이나 질환과 치료에 대해서 깊이 파악해야 하고 쓰이는 약물에 대한 효과뿐만 아니라 기전과 부작용까지도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식칼을 음식에 쓰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유용한 도구로 쓰이지만 그 이외에 용도로 사용된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흉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지식 또한 제대로 쓰이면 도움이 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다르게 알고 있다면 위험한 흉기가 되는 것이다.
Cordarone이라는 약물이 있다. 이는 부정맥 환자에게 쓰이는 항부정맥제 Class 3에 해당하는 약물로, 신경세포 밖에 있는 K+ 가 세포 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활동전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전으로 빠른 부정맥에 해당하는 심방세동, 심실성 빈맥에서 부정맥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심장내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정말 중요하고 유용한 약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Cordarone은 부정맥을 교정하는 데에 쓰이지만 정맥주사 IV로 쓰이는 경우, 비경쟁적으로 beta adreno-receptor blokade의 효과를 가져오므로 혈압이 떨어질 수 있는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심전도 리듬과 맥박을 교정하기 위해서 쓰는 약물이 자칫 저혈압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간호사라면 심전도 리듬, 맥박, 혈압을 주의 깊게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환자의 혈압이 떨어져도 그 약물을 줄이거나 멈추는 것을 고려해야 함을 생각하지 못한다.
뇌출혈 환자에게는 뇌혈관 출혈량 감소 및 뇌압상승을 막기 위해, 1시간 이내에 수축기 혈압을 140mmHg 이하로 낮추는 것을 권고한다. 반면 뇌경색 환자에게는 뇌경색 부위의 관류 감소를 막기 위해 수축기 혈압을 적어도 150mmHg 이상을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따라서 두 환자의 치료과정과 투여되는 수액 종류 및 수액량, 약물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사실을 간호사가 모른다면 의사가 수축기 혈압이 150mmHg 이상인 뇌경색 환자를 그대로 놔두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뇌출혈 환자의 수축기 혈압이 140mmHg 임에도 투여 중인 혈압강하제 수액을 왜 멈추지 않는 것인지 모를 것이다.
발작을 하는 환자에 대한 처치를 모른다면 간호사는 환자의 발작을 멈추게 하기 위한 처치를 생각하거나 다른 환자들처럼 Vital sign을 측정하려고 할 것이고, 올바른 처치를 아는 간호사는 환자가 다치지 않도록 해가 될 수 있는 주변 물건들을 치우고 발작의 유형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대로 의사에게 보고 할 것이다. 이는 의사가 발작 유형에 맞는 치료과정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좋은 간호사가 되는 것은 환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간호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말 환자에게 좋은 간호사는 무엇이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눈을 가진 간호사가 아닐까? 정말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은 정말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