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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모닝 Jan 18. 2024

2-2. 항상 1톤짜리 짐을 끌고 살아가는 느낌이에요.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는 것.








나의 짐과 부모의 짐.




“저는 항상 1톤짜리 크고 네모난 짐을 끌고 사는 느낌이에요.”


 오늘의 기분이 어떻냐는 상담선생님의 질문에 나의 대답은 이랬다. 정말 나는 내 마음을 생각하면 어느 크고 네모난 짐을 매일 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남들보다 하루를 살아내는 게 유독 더 힘들다고 느꼈다.


“아..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저는 항상 가부장적인 아빠에게서 엄마를 보호해야 해요. 엄마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요. 그리고 형제가 저에게 목을 조르던 사건 이후로 그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참으며 살아야 하죠. 어렸을 때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 아빠 둘 다 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든요. 슬픈 일이지만 그런 답답한 가정 속에서도 저는 제 삶도 온전히 잘 살아내야 해요. 제 직업으로도 성공하고 싶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자퇴라는 큰 대가를 치르고 선택한 이 길이니 만큼 적어도 제 직업에 있어서는 잘 해내야 해요. 저는 이렇게 제 자신을 다시 바로 세워가야 하는데도 힘써야 해요.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선하고 옳은 삶을 살아야 해요. 그게 맞는 거니까요.”


“그러면 누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글쎄요..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렇게 살아야 할 것만 같았어요. 저인 거 같아요.”



 그렇다. 나는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를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서 하고 있었고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에 가족에게서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다 끌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내 어깨에 지우지 않은 짐을 내가 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차곡차곡 축적해서.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늘 아빠가 하라는 대로만 순응하며 살았다. 항상 남편을 잘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로. 엄마가 하고 싶은 머리 스타일이 있어도 아빠가 원하지 않으면 단발로 잘랐고, 입고 싶은 옷이 있어도 항상 남들 눈에 잘 띄지 않고 무난하고 평범한 무채색 계열의 옷만 골랐다. 매일매일 구석구석 청소해도 아빠의 눈에 먼지 하나라도 보이면 다시 청소기를 들고일어나야 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도 아빠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도 아빠가 안심할 수 있는 집 근처에서 늘 있어야 했고 아빠의 손 안에서 파악이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삶은 늘 아빠의 일상에 묶여있었고 2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이 생활을 지속했던 엄마는 우울과 강박 속에서 이 결혼생활을 버텨야 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란 나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처참히 무너지는 엄마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다가 머리가 자란 중학생이 되자 본격적으로 엄마를 대신해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면서부터 아빠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적대시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런 나를 많이 의지했다. 엄마에게서 보호받는 자녀가 아니라 엄마를 보호해야 하는 보호자의 역할을 그렇게 스스로 자처했고 그것이 당연하다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부모화예요. 자아 분화가 잘 되지 않은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죠. 자신이 짊어져야 할 부분 와 엄마가 짊어져야 할 문제를 구분해야 해요.”


“그러면 엄마의 문제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것보다 엄마의 문제와 나의 문제를 구분하자는 거죠. 지금껏 엄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아니요. 전혀 나아지지 않았죠.”


“이건 본인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본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에요. 이건 확실히 해야 해요. 이건 엄마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죠.”



 엄마의 문제이니 내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고? 처음에는 이런 말에 납득이 가지 않았고, 남의 문제이니 신경을 쓰는 게 이상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잘못들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 듣다 보니 내 마음속에서도 점점 엄마의 문제와 나의 문제에 선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프면 온 가족이 간병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효에 대한 사회 통념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내팽겨 치는 자녀와 같은 입장이다. 아픈 것은 부모의 영역이고 자신의 삶은 자신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부모를 내팽개쳐라는 의미가 아니라 간병인을 고용해서 부모를 돌보게 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부모를 보러 온다던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도 지키고 자신도 지켜나가는 방법이 있는데, 자신의 영역까지 무너뜨려가며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떠안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분화가 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서적 독립으로 이르는 길, ‘내적분화’



 잦은 부부싸움을 하거나 환경적으로 불안한 가정에서는
늘 불안과 긴장이 맴돕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부모의 불안을 흡수하며
가족 안으로 더욱 깊숙이 융합됩니다.
불안하니까 더 뭉칠 수밖에 없는 거죠.

가족 내에 불안의 수치가 높을수록,
가족 구성원들은 더 연합되게 되고
개별적인 부분은 줄어들게 됩니다.

- 책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수업’  72p -




 자아가 없는 갓난아이는 주 양육자인 엄마와 심리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엄마가 슬프면 아이도 슬프고, 엄마가 좋으면 아이도 좋은 즉, ‘엄마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인 것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와 떨어져서 불안함이 증폭되는 분리불안 시기를 지나면 독립성을 추구하는 자아분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3세가 될 무렵 1차 분화가 시작되면서 엄마의 껌딱지였던 아이는 점차 엄마와 떨어져 노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 정신적인 분화인 2차 자아 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부모의 가치관과 생각, 감정에서 벗어나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시기를 만나게 된다



진짜 어른 다운 어른이 되었다는 건,
자아분화가 잘 이루어져 연합성과 개별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아분화가 잘 이루어졌을 때,
원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해, 한 가정을 꾸릴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책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수업, 73p.’


 

 ‘정서적 독립’은 원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에 대한 적절한 경계를 세우면서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의 영역과 원가족의 영역을 잘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역이 아닌 것들을 괄호 안으로 넣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와 자아가 약한 어머니 사이의 불안한 부모 관계에서 불안을 모두 흡수하며 자랐고 약자인 어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자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엄마의 생각과 감정을 나와 동일시했다. 자신의 생각을 건강하게 독립시키는 과정인 자아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한 가지 더 확실히 해두고 싶은 건, 본인의 삶이 이렇게 힘든 건 본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본인 때문에 이렇게 삶이 왜곡되고 꼬인 게 아니랍니다. 가족으로부터 그렇게 커왔기 때문이죠. 자, 그럼 이제 마음이 어떤가요?”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요. 그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이제라도 안게 어디예요~ 정말 대견한 거죠. 본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도 이를 아는 사람도 많이 없고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죠.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Here and Now.





“저는 이렇게 불안한 가정환경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렇게 살아온 제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저는 항상 웃을 수가 없어요. 웃어도 웃는 게 아니라는 말 그게 정말 맞아요. 입꼬리가 올라가는 찐 웃음을 지어 본 지 오래됐어요.”


“목이 졸렸던 일도, 형제에게 괴롭힘 당했던 일도, 가족 안에서 있었던 일 모두 바꿀 수 없는 과거예요. 과거를 자꾸 생각하는 것은 우울과 관련되어 있고, 미래를 자꾸 생각하는 건 불안과 관련되어 있어요. 가족의 일은 괄호 밖으로 빼내고 나의 일에만 집중하세요. Here and Now에 집중하는 거예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할 수 있는 이 하루를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로 산다면 매일매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진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지금껏 과거의 내가 온전하게 자라지 못했으니 앞으로의 나날도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실패했으니 앞으로도 똑같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나의 하루를 덮게 놔둘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이 있는 매일의 순간을 누릴 것인가. 그래서 현재를 present 선물이라고 하나보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상처 없이 행복하게 자란 사람이든 현재라는 시간은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흘러가니까.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처럼 그 누구에게나 아침의 해가 뜨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하루가 주어지니까. 그러니 지금 현재 내가 밟고 서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자. 과거의 아픔을 충분히 수용하고 아파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과거로만 오늘 하루를 덮지 말자. 우리에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하루를 선물 받았다.



“와.. 선생님 이렇게 하니까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 거 같아요. 너무 신기해요.”


“그렇죠? 그동안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왔어요. 뭐든지 Here and Now를 기억하고 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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