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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모닝 Jan 19. 2024

2-4. 가만히 못 있겠어요. 늘 뭔가 해야 해요.

엄마를 닮아가는 삶 그리고 자신의 선택.








단 한순간도 가만히 쉬지 못하는 나.



 3년 전의 나는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등산에 취미가 생기면서 오프날이나 밤늦게 출근하는 날이면 무조건 아침에 등산을 갔다. 그 당시 내가 살고 있는 부산지역의 모든 산을 다 갔었고, 근처에 있는 울산, 양산, 창원의 높다는 산들은 대부분 올랐었다. 보통 등산을 하고 나면 왕복 3시간 이상 걸리기에 아침 일찍 산을 올라 점심을 먹고 집에 도착하면 오후 2-3시쯤 된다. 그러면 산을 오르면서 찍었던 사진들과 동영상들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리고 SNS에 내가 도전했던 산에서 찍은 인증샷을 올린다. 그 뒤로 블로그에 쓴 내 글이 상위 몇 위에 랭크가 되는지 실시간으로 살펴본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가 하면, 산을 오르지 못하는 날이면 오전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2시간씩 하고 집으로 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임상에서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블로그에 글로 정리해서 올린다거나, 하루를 의미 있게 보냈다고 생각할 만큼의 여행을 갑자기 떠난다. 그리고 역시나 여행에 가서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들을 정리해서 또 블로그에 올리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며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낸다.


“그거 자기 학대예요.”


“자기 학대라고요? 운동을 하고 등산을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게 자기 학대인가요?”


“그거 전부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들인가요?”


“아.. 물론 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면요. 하고 싶지 않은 날도 많았어요.”


“그런데 왜 하고 있었나요?”


“그걸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면 뒤처지는 것 같고, 충분히 좋은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것도 느끼면서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시간에 무기력하게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걸 제 스스로가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것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거죠.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하니까. 그리고 강박도 있는 것 같군요.”



 상담선생님이 질문했을 때 나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미 진작에 눈치채고 있는, 피하고 싶은 사실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놀라기도 하고 이때다 싶어 직면하자라는 마음도 들었었다. 사실 나는 등산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다. 하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굳이 등산길에 올랐던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았고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낼 새로운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등산을 가는 게, 가만히 시간만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보다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 팔, 다리 못쓸 때쯤 후회하기 싫어서 젊었을 때 이것저것 해보고 고생할 거 고생해 보고 여러 가지 도전도 해보고 하고 있는데.. 저에게 의미 있는 일이란 하루를 잘 살았다고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인 거 같아요.”


“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음.. 자기를 끊임없이 성장시키는 일이요. 그게 정신적이든, 직업적이든, 신체적이든 상관없이요.”


“그러면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어떤 마음이 느껴지나요?”


“아무 가치없이 느껴져요. ‘오늘 하루 헛살았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시간낭비 했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무기력하게 소파에 누워있는 모습이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웃는 얼굴보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일 정도로 입꼬리와 눈꼬리가 내려간 우울한 얼굴이다. 유치원생일 때도 초등학생일 때도 꽃처럼 예쁘다고 생각한 엄마였지만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엄마 왜 이렇게 이뻐?”라고 하면, 엄마는 “뭐가 이뻐? 매주덩어리지 엄마는.”이라며 어김없이 부인했다. 그런 엄마는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뇌에 있는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 뒤로 한쪽 눈이 안 보이고 나이에 비해 무슨 일이든 잘 잊어버리곤 했다. 그 뒤로 매번 자신은 눈이 안 보이고 잘 잊어버려서 멍청하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스스로를 한없이 깎아내리던 엄마. 충분히 무언가를 도전할 수 있는 30대의 나이에도 엄마는 자신이 뇌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채 약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뇌수술 이후에 엄마는 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형제를 키우며 1년 365일을 집안일만 하며 바깥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집에만 갇혀 생활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눈앞에서 여러 재롱을 떨었지만 나는 엄마의 굳어버린 얼굴을 쉽게 펼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생각이 자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집안일만 하며 남은 시간에는 무기력하게 소파에만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답답했다. 40, 50대에도 충분히 자기 인생을 꾸리며 살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엄마는 아빠의 통제 아래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집안일만 하며 지내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맨날 힘없이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을 정말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에게 여러 차례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봤지만 엄마의 마음은 자식인 나조차도 풀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잠겨져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도 보이는 게 싫었던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나머지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쉬는 건데도 그 잠시 풀어지는 그 순간도 못 견디는 거죠.”


“제 사진 속에서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게 너무 싫었어요. 마치 엄마의 그 모습을 닮아갈까 봐. 그 우울과 무기력한 삶을 저도 똑같이 살까봐 두려워요, 선생님.”


“부모와 자식이니까 닮을 수밖에 없어요. 유전적으로 엄마의 모습이 내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하죠. 그리고 지금껏 그렇게 엄마를 보고 살았으니, 딸의 입장에서는 엄마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라고 인식하죠. 그렇게 영향을 많이 받고요. 아마도 엄마는 우울한 기질을 오랫동안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본인이 뱃속에 있었을 때조차도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엄마를 닮을 수밖에 없는 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다르다고. 그 나머지 3명의 가족과 나는 별개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담선생님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본인 안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화가 나는 건, 엄마를 향한 분노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는 쉽게 없어지지 않아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다 보면 그 분노를 맞닥뜨릴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가 올 겁니다.”


“아 그런 거군요.. 선생님, 과연 제가 엄마 이전 세대로부터 계속 이어진 이 무거운 우울의 고리를 끊어내고 저로서 온전히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가만히 있었다면 엄마의 삶을 똑같이 살거나 더 심하게 우울증과 무기력한 삶을 살아갔을 거예요. 하지만 주어진 인생의 흐름에 그저 휩쓸려 흘러가느냐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느냐는 자신의 선택이에요. 본인은 엄마를 닮은 사람이지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 기억하세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 사실들을 상담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고 다시 새로운 양육자(상담사)에게서 커가고 있으니 달라질 거예요. 자신을 믿으세요.”


 과연 엄마도 끊어내지 못 조상의 대물림을 내가 끊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내비칠 때면 그때마다 스스로를 믿으라며 용기를 주던 상담선생님. 그 이후로 나는 일상에서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부러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도 해 보고 다른 사람들과 만날 약속도 최대한 미뤄가며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보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기력하고 엄마의 모습을 오버랩시키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며 그저 쉬고 있는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달래 보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처럼 스스로를 믿어주었다. 나는 이 우울의 고리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지금 현재의 나는 하루종일 이불을 덮고 앉아서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나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이불을 덮고 누워서 뒹굴거려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로서 있는 것이 너무 좋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왜 그동안 이런 온전한 쉼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뒹굴거리는 나를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세상을 이리저리 탐험하고 싶었던 나.




 사실 한시도 가만히 못 있었던 나의 이면에는 이리저리 세상을 탐험하고 싶었던 어린 내 모습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하루하루 꿈이 자주 바뀔 만큼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너는 소질 없어서 안돼.” “이건 진짜 잘하는 사람들만 하는 거지 넌 안돼.” “~해서 안돼”였다. 더구나 세상에서 당당하게 자신으로서 살아가지 못했던 엄마의 불안과 우울함이 한몫을 했다.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을 위협하고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었고 딸인 나는 그 왜곡된 안경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덮어놓고 키웠다는 게 맞는 것처럼, 무슨 일을 도전하려고 하다가도 ‘넌 안 돼. 이건 저 사람처럼 이런 걸 잘해야 할 수 있는 거야.’ ‘넌 이래서 안 돼’라는 식으로 변명을 늘어놓고 세상에 나서지도 못하고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높아서 못 오를 거라고 생각했던 한라산을 한번 오르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다른 높은 산들도 여럿 도전하게 되고 내가 알고 있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재밌고 새롭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배워보지 않았던 첼로와 플루트를 배워보기도 하고, 우연한 기회에 블로그 체험단으로 필라테스, 골프, 클라이밍, 복싱도 배워봤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다고 외쳤을 만큼 미술을 좋아했는데, 명화를 따라 그려보는 체험도 했었다. 너무 하고 싶었던 거라 6시간을 화장실도 안 가고 그 자리에서 명화를 따라 그렸을 만큼 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험에 한껏 굶주려 있었던 어린아이였다. 호기심이 많아서 들판을 막 뛰어다니는 어린 강아지처럼 신나 있는 나도 발견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마치 내가 이런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사람인데 왜 자꾸 안 된다고, 넌 할 수 없을 거라고 하는 부정적인 메시지만 나에게 심어줘서 내 세계를 좁게 가두어 놨냐며 부모에게 화나있는 아이도 보였다. 정말 만감이 교차했었다.







 그래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은, 그렇게 세상을 탐험하는 것이 오랫동안 굶주려 왔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든 안된다는 생각보다 ‘어디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굶주린 만큼 모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의 가능성을 느낀 나머지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 용기는 지금 현재도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많은 영향과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으며 나의 삶에도 아주 큰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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