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요’라고 늘 외치고 다녔던 이유.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홀로 남겨질까 봐.
먼지처럼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었다.
- 2022. 05. 21 일기 -
어렸을 때 나를 생각했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른 기억 중에 하나가 거실에 홀로 남겨져 내복을 입은 채로 쭈그리고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공기도, 방바닥도 차가운 거실에 앉아서 TV 뒤편으로 열려있는 창문을 보면서 외롭게 엄마를 기다리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 속으로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나는 그때부터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감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언가 잘하는 것이 있어도 관심을 받거나 칭찬을 듣기보다 ‘자만하지 말고 너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왔고, 나의 생일이어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생크림케이크를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에서 수업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 가정통신문을 통해 물건 리스트를 가져와 엄마에게 보여주면 어떤 물건인지 대충 본 다음, 나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알아서 사오라고 했었고 학교 수업참관의 기회가 있을 때도 부모님은 거의 오지 않았다. 가족끼리 함께하는 방학숙제는 물론이고 학습지며 참고서며 학원이며 다 홀로 알아보며 찾아다녀야 했고 진로 또한 나 혼자서 고민해야 했었다. 심지어 한 번도 아파서 조퇴한 적이 없던 내가 배가 아파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내가 어디가 아픈지 살펴보지 않고 바로 불호령을 내리며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고 나에게 당장 학교로 돌아가라고 엄포를 놨다. 가족끼리 외식을 나가면서도, 내 옷을 사러 마트에 가면서도 내 의견은 묵살되고 가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존재하였으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감정도, 마음도, 생각도,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성인으로 자라왔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감을 가족 안에서 느끼지 못하며 자라온 내가 자기주장을 잘할 수 있었을까? 단연코 아니다. 자신의 주장은 커녕,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 보며 세상을 살아왔고 칭찬을 못 받을 거면, 적어도 지적으로 주목받지 말자 라며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며 살아왔었다. 그러던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SNS를 하면서 게시물을 하나 올렸는데, 사람들의 ‘좋아요’ 갯수를 보자마자 마치 내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갯수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좋아요 수를 많이 받을 수록 존재감을 더 크게 느꼈고, 블로그를 하면서도 내 글을 얼마나 조회했는지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 되곤 했다. 그러다보니 나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리고자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가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SNS에 올렸다. 등산, 골프, 필라테스, 헬스, 미술, 클라이밍, 복싱, 서핑, 첼로 및 플룻배우기 등의 다양한 취미 뿐만아니라 퇴사를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이것저것 올린 것도 바로 이때였다. 나는 먹이를 찾아 헤메는 하이에나처럼 무언가를 성취할 만한 것들을 찾아 해메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뭔가 성취하지 않으면, 무언가 이뤄내지 않으면 불안해요.”
“그만큼 관심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자마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할정도로 많이 목이 말라있었던 거죠.”
“아.. 그런거였군요. 너무 마음이 슬퍼요 선생님.”
“맞아요. 이건 너무나도 슬픈이야기에요. 지금 본인은 나 여기있다고 계속 말해줘야 자신이 존재하는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방방 뛰면서 손짓하지 않아도, 외치지 않아도 모두가 본인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있는데, 본인만 그걸 몰라서 계속 외치고 있었던 거에요. ‘부모가 키울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동물에게 자식을 맡겨라’는 말이 있어요. 동물은 적어도 자기 자식을 이리저리 혀로 핥아주면서 정성스럽게 키우고 새끼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물어서 빼내주기도 하고 새끼들과 있을 때는 재미있게 잘 놀아주니까요. 그런데 지금 본인은 방임, 방치 당한거나 다름없어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쉽게말해 양육이 전혀 없었던 거죠.”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관심을 받지 못한채 외로운 시절을 오랫동안 보내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그 숨막히는 틈바구니에서 희망을 가지며 홀로 자라왔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 한켠에서부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미어져왔다. 나는 나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사진 속에서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줄거야. 니가 느끼는 감정, 생각, 하고 싶은 말, 너와 관련된 일 모두 내게는 너무 소중해. 이제부터는 내가 다 들어줄거야. 시간이 오래걸려도 괜찮아.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언제든지 내게 와서 말하렴. 그만큼 너는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내 마음 속 방방 뛰며 자신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있던 아이는 어느샌가 자기 자리에 가만히 서서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을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