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영 Jun 07. 2020

시시한 어른으로 사는 법

1.

어느덧 유월이다. 아침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6시 20분, 출근하기 위해선 늘 그쯤엔 일어나야 한다. 간밤에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 네 시 언저리에 두어 번 깼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잠에 들려 노력했지만 곧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온갖 꿈을 다 꾸었던 거 같다.

그나마 악몽은 아니어서 다행. 악몽을 자주  때는 자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보면  4 언저리. 왜 꼭 4인지 4는 왠지 불길한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서워도 눈 감아야만 다음 날을 살 수 있어서 꿈속에서도  밖에서도 편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끔찍한 악몽 (엄마가 백안으로 나와 고개를 꺾으며  괜찮니 묻는다거나 하는)  날이면 언니 침대에 기어들어 가거나, 언니가  침대에 와서 손을 잡아주고 자기도 했다. 그러면 안심이 됐다. 이게 진짜라는 안심.

출근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아침잠이 많은 언니가 잠에서 깬 건지, 밤을 새운 건지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안 자?


 잠 안 와. 어제 너무 많이 잤잖아. 너도 어제 12시간 넘게 잤어.



어제는 친구 집에 있다 돌아와 종일 잠만 잤다. 채이 집에서 채이가 영화를 틀어주곤 “꼭 봐, 재밌어” 하고 잠드는 바람에 나와 이른이는 말 잘 듣는 어린이들처럼 앉아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는 늙지도 않는 이정현이 나왔다. 남편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집을 사고, 그 집이 또 재개발 지역이 되고,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렸고.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 여자가 말간 얼굴로 사람들을 퍽퍽 잘도 죽이는 영화를 새벽 4시까지 보고 잠들었다가 아침 7시에 일어나 집으로 왔다. 집에서 밥을 시켜 먹고 또 잤다. 그렇게 잠을 잤는데도 꼭 악몽을 꾼 날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6월의 첫날이 하필 월요일이라니. 출근하고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달력을 보니 아직도 달력은 5월이었다. 아, 이제 6월이지. 달력을 넘기니 이번 주 스케줄이 빼곡하다. 이제 겨우 한 주의 시작인데 말일까지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는구나 싶어 속이 울렁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사수가 금요일부터 자가격리에 들어가 그의 몫까지 자잘한 업무까지 늘었다.



지난주 금요일 아침, 사수가 출근하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계장에게서 들었다. 그리곤 사수에게서 일을 좀 해줘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할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는 퇴근까지 본인 기획전 진열도 안 되어있었다. 나는 군말하지 않고 그냥 그의 몫까지 일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어도 일은 일이라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이 더 많아지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일요일에는 물류로 출근을 해야 했다. 부장이 동의도 없이 물류 출근자 명단에 내 이름을 적는 바람에 내가 가게 된 것이었다.



 야, 아영아, 주말 물류 출근 명단 일단 네 이름 썼다. 나중에 뺑뺑이 돌려 정하자.



부장은 데스크 맨 끝에 서서 반대편 끝자리인 내게 들리게끔 크게 말했다. 꼭 그런 말은 멀리서 말하더라. 예상대로 나중은 오지 않았다. 아무도 안 가고 싶은 물류 주말 출근을 뺑뺑이를 돌려 정할 거면서 굳이 내 이름을 적는 건 만만한 내가 가라는 거겠지 싶어 며칠 뒤에 그냥 내가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말이 “원래 네가 가기로 했잖아.”

다행히 사수의 자가 격리로 내 주말 출근은 무산됐다. 그거 하나는 사수가 잘한 일이 확실했다.



6월의 첫날부터 사수의 몫까지 챙기며 내 일도 해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전화도 미친 듯이 왔다. 팀원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도 고요하고, 조용히 움직이는 우리 팀에서 나만 혼자 양은냄비처럼 꽝꽝거리고 펄펄 끓었다. 내 인내심은 어디까지인가, 나는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가 확인하는 일. 분주히 움직여야 야근을 면할 수 있으니 몸과 마음이 바빴다. 어느 것도 내 뜻대로 손에 쥐어지는 법이 없으니 달려가서 잡아야 했다.



그나마 마음 놓고 쉬는 시간은 화장실 갈 때, 밥 먹을 때였다. 특히 화장실, 화장실에는 볼 일이 없어도 가서 잠깐씩 앉아있다 나오곤 했다. 아무도 안 보고, 안 들리는 곳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은 회사 안에서 화장실밖에 없었다. 회사의 온갖 소문과 욕과 배설은 언제나 여자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의 룰은 무엇을 보고 들어도 못 본 체하고 나오는 것이다. 나는 7층 사무실을 쓰면서도 굳이 6층에 내려가 화장실을 썼는데 바쁠 때는 7층에도 자주 갔다. 7층 화장실에서는 물이 새는지 바닥이 정체 모를 물로 흥건했다. 그래도 여기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앉아있었다. 여기밖에 없다. 7층, 사무실, 화장실 한 칸, 변기 위.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간절한데 꾹 눌러 참고 열심히 사는 내가 어이없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서른이 되면 좀 다를 줄 알았었다. 특별히 잘나진 못해도 시시한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웬걸 그냥 어른이 되기도 쉽지 않았다. 노동과 고통의 대가로 돈을 버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지 싶다가도 내 노동의 대가가 너무 값싼 거 같고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시시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랄까.

내가. 아직은. 이만큼 밖에. 안 되는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일이 10분을 넘기기 전에 ‘나약한 소리 하지 말고 일하자, 시시하기도 되게 어려운 거다!’ 하며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볼 일 없이 앉아있는 변기 위에서는 주로 그랬다.



매달 나가는 월세를 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학자금도 갚고, 밥도 먹고, 옷도 사 입고, 추울 때 따듯하고 더울 때 시원하려면, 가끔 엄마 용돈도 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대출이라도 받아서 전세로 갈까 싶어서 집을 알아보고 있지만, 형편에 맞는 집이 없다. 1억을 대출받아도 남은 5천만 원이 없다. 부모 도움 없이는 서울 땅에 집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된다. 아직은. 아마도 오랫동안 그렇겠지. 엄마한테 말해볼까, 설득이 쉽진 않겠지만.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린 집도 없고 절도 없어. 엄마한테 말해보자.]


 [니가 말해봐.]



서로 말을 미루기만 하다가 대화는 끝났다. 서른과 서른일곱짜리 어른 둘이 머리를 맞대고 내리는 결론이 육십이 넘은 부모 찾기인 게 민망해서, 민망한데 어쩔 수가 없어서 서글픈 유월의 시작이었다.




2.

이번 주말엔 친구네 집들이가 있어서 내가 갖고 싶었던 룸 스프레이를 선물하려 했다. 친구는 캔들이 갖고 싶다기에 다시 마음에 드는 캔들 찾기에 나섰다. 마음에 드는 걸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너무 싼 것도 싫고, 흔한 것도 싫다. 인체에 무해한 재료로 만드는, 켜 두기만 해도 방 안에서 숲을 걷는 느낌이 드는 향이면 좋겠거니 싶었다. 거기다 패키지가 예쁘면 더 좋고. 한참 검색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걸 딱 하나 발견했다. 사각의 세라믹 틴 케이스 캔들. 케이스까지 빈티지해서 인테리어 효과도 있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향을 골랐는데 품절이었다. 못 사겠다 싶어 포기했다가도 혹시나 입고될까 싶어 매일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이러다 꿈에도 나올까 봐 문의까지 남겼다.



 [혹시 재입고 예정이 있으신가요?]


질문을 올린 날 밤에 답글이 달렸다.


 [해외 배송 준비 중입니다. 재입고는 인스타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정은 있는데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 다른 걸 살까 싶어서 둘러봐도 그만한 게 없어 보였다. 검색, 검색. 온갖 사이트를 뒤져서 결국 재고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거기엔 원형 케이스도 있었다. 원형은 내가 갖고, 사각은 선물해야겠다 싶어 선물용을 먼저 구매했다. 나도 이사를 하면, 더 넓은 집이면 예쁘게 꾸미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예쁜 캔들에 원목 책상에 좋은 의자를 두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지금 사는 집은 4년을 살아도 내 집 같지 않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하나를 사도 마음에 드는 것, 제대로 된 걸 사야지 싶어서 물건을 쉽게 사지 않다 보니 내 물건이라고는 옷, 책, 책상 외에 자질구레한 것들뿐이다. 좋은 걸 보고, 알 수는 있어도 사지는 않는다. 갖고 싶은 것들은 있으면 좋지만 당장은 필요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굳이 지금 사지 않아도 내가 죽지는 않으니까. 취향보다는 생활이 먼저다.

근데 하필 주문을 목요일에 해서 주말에 들고 갈 수 있을까?


 당일 배송되나요?


이번엔 전화를 걸어 물었다.


 네, 3시 이전 주문은 다 당일 배송입니다.


다행이다. 제때 선물해 줄 수 있겠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았다. 이번 주에 이거 하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돼서, 해야 하는 일로 남겨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어느 것도 쉽게 손에 쥐어지는 법이 없다. 내 인생의 설정값이 그런가 보다. 움직여야 겨우 얻는다. 주저앉을 겨를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