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겨울이었다.
스물다섯, 안 그래도 힘든 경기에 하고 싶은 거 해보겠다고 뻔뻔스럽게 손 벌리기가 죄송스러워서 세 달 동안 보험회사의 사무보조 일을 시작했다. 내 첫 사회생활이었다. 신고식은 호되게 치러졌다. 일명 시간또라이였던 사수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널뛰기를 하고, 나는 눈칫밥을 먹으면서 일을 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업무 멘트는 ‘다, 나, 까’로 통일하고,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나와야 했다.
3개월이 3천 년 같이 느껴졌다.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길이라고, 앞길은 가시밭길이라고, 후회되면 돌아가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왜 한다고 했나, 이렇게 고생해서 갔는데 생각했던 게 아니면 어쩌지,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다가도 이미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고 가야 했다. 그래도 화장실에서 우는 날이면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었다.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이 한 구절이 온몸을 흔들었다. 언젠가 나로서 존재하길 소망한다고 일기에 썼던 적이 있었다. 끌려다니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내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길 원한다고.
정유정 작가의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정신병원에 갇힌 두 청년의 이야기이다. 엄마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병을 얻어 열여덟부터 스물다섯까지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살아온 수명이와 이복형제에게 붙들려 강제로 입원하게 됐지만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승민이가 나온다. 수명이는 승민이의 탈출을 도우다 번번이 궁지에 몰리면서도 자신도 탈출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수명이를 보고 청소부 아저씨는 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냐고, 수명이의 병이‘세상에서 도망치는 병,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병’이라고 말한다.
수명이는 승민이의 마지막 탈출을 돕는다. 승민이 목숨과 자유를 맞바꾸는 선택에 자신도 따라나선다.
“내가 널 따라온 건 알고 싶어서야.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이제 빼앗기지 마, 네 시간은 네 거야.”
그렇게 승민은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았고, 수명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한다. 평생 굶어 죽을 일 없이 안전이 보장된 병원을 나선다. 되돌아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을 안은 채로 달려간다.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상대하기 위해.
우리는 늘 꿈을 꾸고 시도하지만 곧 다시 되돌아와 일상을 찾는다. 꿈과 자유를 가지고 떠난 바깥세상은 현실이다. 현실에 부딪혀 깨지고 구르면서 버티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과 맞설 용기, 자신을 이겨낼 용기.
물론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과 확신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의심을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재능에 대한 의심,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드는 자괴감까지 모두 짊어지고 헤쳐 나가야 한다. 가야 한다면.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쫓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이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中>
때때로 주위 사람들 말에 휘둘리기도 하고, 가끔 좌절하고, 자주 현실과 타협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아 이게 아니지, 남이 원하는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걸 해야지. 끝까지 갔는데 원하던 끝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간혹 한다. 어쩔 수 없지 선택을 했으니 책임도 져야지. 아니면 다시 돌아 나오면 되는 일이다.
누군가는 영화 속의 수명이처럼 꿈도, 자신도 없을 수도 있다. 꿈이 뭐 별 건가. 먹고 싶으면 먹고, 하고 싶으면 해 보고 그렇게 조금씩 작게나마 내 선택들로 채워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때로 승민이가 되기도 하고, 수명이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고. 그럴 때는 눈 감고 딱 한 발만. 다시 돌아와도 괜찮으니까. 한 발 내딛기 전의 나와는 분명 다를 거라고 믿는다.
몇 년 전, 패션회사에 가겠다고 공기업을 바라던 부모님을 설득하며 고군분투할 때 썼던 글이었어요. 이후에 정말 원하던 일도 해봤고 (토할 만큼 힘들었지만) 그 일에서 돌아 나왔고, 직무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같은 직종에 다니고 있어요. 그때는 그게 제일 좋았고, 열심히 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제 삶에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일단 한 발만 떼보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