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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방백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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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Feb 15. 2018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에 멀었다

땅에 발을 딛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어지러운 날이 있는지. 나는 가끔 그렇게 어지럽다.

삶은 때로 너무 벅차게만 느껴지고,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라고 생각되면 몸의 감각이 생생히 살아나 세상이 내게로 돌진하는 듯이 느껴진다. 웅크려야 하는지, 맞서야 하는지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갈지 자로 휘청대며 걷는 것이 어른의 삶일까? 언제까지고 이렇게 흔들리는 건가 싶을 때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모처럼 긴 명절을 맞이했던 10월 초, 나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었고, 저녁이면 산책을 했다. 걷는 동안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오롯이 걷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좋아서 매일 밤을 나가 걸었다. 갈대숲 사이와 산책로를 번갈아 걸으며 생각을 걷어냈다. 그렇게 온통 축제 같은 휴일이 하루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가만히 웅크려 시간을 보내다 연휴의 막바지에 오랜 친구 Y와 함께 낙산공원에 올랐다.
Y와는 17살 때 처음 만나 어느덧 27살이 되었다. 27살의 나는 회사를 관두고 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었고, Y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같은 곳을 다니다 비슷하게 고향을 떠나 삭막한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지하철에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선 사람들처럼 낯선 도시의 틈을 채웠다.


찬 공기를 헤치며 공원에 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볼 때마다 생경하다. 늘 올려다보기만 했지 훤히 내려다볼 기회는 잘 없으니까. 있다고 해도 빽빽한 빌딩 숲과 그 사이에 점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때와는 달랐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보였다. 인왕산도 보이고, 저 멀리 잠실 롯데타워도 보였다.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로 하나, 둘씩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빼곡히 지어진 집들이 색색깔로 불을 밝히며 반짝였다. 그제야 좀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다들 사는구나, 여기 이렇게 사는구나.'
아무것도 아닌데도 반짝여서 아름다웠다.


조용히 앉아 보려고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정자를 찾았다. 이화 벽화마을로 이어지는 길에는 정자가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한산하고 뷰도 좋은 곳을 전에 왔을 때 봐 두었었다. 꽤 늦은 저녁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정자에는 이미 낯선 남자 둘이 풍경이 보이는 쪽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올라오면서 산 김밥과 맥주를 먹으면서 눈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나는 밤하늘 아래로 넓게 펼쳐진 서울을 바라보며 Y에게 말했다.
 
"Y야, 저 많은 집들 중에 내 집이 하나 없다."

Y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경복궁이 저쯤이려나? 하고 혼잣말처럼 읊조렸는데 내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낯선 사람이 대답을 했다.

"에이~ 저긴 아니지."

뜬금없는 대답에 Y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가 봐, 그래 그런가 봐. 그리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대화를 하다가도 가끔 말을 잊었다. 취업, 공부, 결혼 같은 현실적인 단어는 풍경 앞에 무력해졌다. 시선을 빼앗는 풍경에 완전히 넋을 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까 그 사람은 아니었다.

"두 분 여행 오신 거예요?"
Y가 대답하기를 머뭇거려서 내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서울 사시는 거예요? 사투리를 쓰시길래."
"고향이 경상도라서요."
"그러시구나, 근데 지금 갑자기 서울말 쓰시는 건 아니죠?"


낯선 이의 어색한 농담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질문이 이어졌다.

"추석인데 고향에 안 내려가셨네요. 못 간 건가요? 안 간 건가요?"
"둘 다요. 아직 취업을 못했거든요."
"그럼 쉽지 않지. 저희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왔어요."



대화를 하다 보니 오늘은 무슨 날인지, 여기는 어디고, 나는 어디쯤인지 다시금 떠올랐다.
잊고 있던 현실로 자꾸 끌어당기는 듯했다.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모르는 사람이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Y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려갈까?"

금세 쌀쌀해진 밤공기에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있는 카페를 가기로 하고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얘기 나누다 가세요."

대화를 나눴던 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카페로 내려가면서 우리가 금방 겪은 일이 정말 엉뚱하고,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정면만 보며 하는 의미 없는 대화, 재미없는 농담들.
마치 홍상수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Y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거리가 멀어지자 와하하 하고 웃었다.


"세상 참 오지랖 넓고, 웃긴 사람들 많다."
"어 진짜. 근데 거기에 내가 대답을 해줬다는 것도 웃기다."



그 사람들 노총각이지 않을까, 우리만큼 처량하다 하고 웃으며 길을 내려와 카페에 들렀다. 마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조금 더 앉아있다 가기로 했다. 우리는 야경이 잘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Y에게 진작 여기로 올걸 그랬다고, 아까는 그 사람들 때문에 집중이 안됐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영아, 근데 니는 참 말도 예쁘게 하고, 사근사근하더라."
 Y는 연신 풍경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는 내 사진도 몇 장 찍어줬다.

"내가? 원래 경상도 애들이 다 그렇잖아." 하며 너도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 걸면 대답도 잘 안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어딜 가나 다 기본적으로 하는 게 있잖아."
"아니, 근데 니는 다른 애들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다."
무슨 느낌인지 몰라서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참 잘 컸다."
"뭐라고?"
"니 참 잘 컸다고."
뜬금없는 칭찬에 나는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진짠데."
"됐고요. A는 뭐 하려나?"
나는 괜히 쑥스러워 말을 돌렸다.
"영상통화 한번 해볼까?"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내려 간 A에게 전화를 걸어 야경을 보여줬다. "야 우리끼리 먼저 왔다. 미안, 근데 진짜 좋다. 부럽지?" 다음에는 패딩 입고 와야 한다고, 또 함께 오자고 약속했다.


Y는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꼭 현실세계로 넘어오는 장면 같다며 아쉬워했다. 내려가기 싫다는 말을 둘이 번갈아가며 백 번쯤 하고 나니 어느새 지하철 역이 코 앞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현실로 돌아왔다.





노량진이 가까워지자 지하철 창문으로 커다란 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난 저 메가스터디 간판이 보이는 게 너무 싫다? 여기가 노량진이구나 싶어서 숨이 탁 막힌다니까."
Y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노량진역을 수없이 지나며 봤었는데 간판이 저렇게 크게 보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야, 열심히 하니까 잘 될 거다. 잘 가. 연락해."
문 앞에 선 Y에게 손을 흔들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를 했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위로를 건넸다.
'잘 될 거야. 힘내.'
나한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현실인 게 느껴졌다. 뻐근해지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집으로 오는 길이 아쉬워서 한 정거장 미리 내려걸었다. 걷는 동안 Y의 무던한 사투리가 자꾸 맴돌았다.
'니 참 잘 컸다.'
그 말이 고마웠다. 스스로가 못났다 느껴지고, 자꾸만 작아질 때 너 아직 괜찮다고 해주는 듯했다.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워 살포시 웃었다.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의 말에 꼬박꼬박 답해주길 잘했다 싶었다. 말이 말로 돌아왔다.
 '내가 친구를 잘 뒀네, 이게 뭐라고 위로가 되네.'


누우면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날들.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직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건네어진 말. 나는 Y의 무던한 그 한마디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가끔, 세상에서 제일 별로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 말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스치는 말에 온기가 느껴지도록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한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었지 하며 쑥스럽게 미소 지을 수 있도록.



건조하고 위태로운 삶이다.
당장 나조차도 감당하기가 버거워서 다른 이의 손을 잡아 줄 여유가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손을 잡고,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진심이 진심으로 닿지 않더라도, 왜곡되고, 조각나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균형을 잡는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잡아주면서.
때로는 아주 작은 진심이 누군가의 전체를 무너지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얼어붙은 세상에서도 사람은 따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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