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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방백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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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Feb 11. 2018

당신과 나

작년 12월 22일의 양력 일은 11월 5일의 음력 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27번째 내 생일이자 벌써 61번째를 맞이한 우리 아빠의 생신이기도 했다. 출근길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 뭐 해.

이제 밥 먹으려고 하고 있지.

아빠, 생신 축하해요.

고마워, 우리 딸도 생일 축하해. 네 카카오 스토리에 댓글 달고 있었는데.

난 하지도 않는 카카오스토리에?

허허 그래도.
응 아빠 좋은 거 못해줘서 미안해.

괜찮아, 너나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일해.

알겠어 아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우리 딸.


어릴 때부터 아빠는 다정했다. 권위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다른 친구네들 과는 달리 친구처럼 아빠를 부르고, 이야기하며 지냈다.

내 어린 시절 기억으로 엄마는 한여름 태양처럼 뜨거웠다면, 아빠는 한겨울의 모닥불 같았다고 하겠다.


어릴 적에는 손재주가 좋아 그림을 잘 그렸다던 소년은 옷감을 만지며 세탁소 문을 열던 청년이 되었고, 선을 보고 만난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첫아이를 품에 안고 가장이자 아버지가 된 후에는 맞춤 커튼과 침구를 파는 실내 장식 가게를 열었다. 그 가게 뒤켠에 세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뒤 둘째인 내가 태어났다. 나는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야 함께 살았다.

엄마 아빠는 그 시절을 두고두고 읊으며 내게 진 빚이라 생각하는 듯했고,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들에게 빚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과 할머니의 젊은 날을 양분 삼아 자랐다.


첫 취업을 하기 전, 요즘 뭐 하고 있냐며 물어오는 아빠의 말에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엄마는 이때다 싶어 잔소리를 시작했고, 아빠는 먼저 말을 꺼낸 게 미안했는지 조용히 다가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슬쩍 와서 용돈을 쥐여줬다.
"돈 달라는 말은 안 했는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내 핸드폰 밑에 감쪽같이 숨겨두고는 눈짓으로 알려준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하며 속닥속닥. 전 날 아르바이트비가 자꾸 제날에 안 들어와서 걱정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설날에도 갓 스물이 된 동생들이나 세뱃돈을 받는 중에 아빠는 내 세뱃돈을 챙겼다. 우리 집에서 제일 불쌍한 애라는 농담을 하면서.


사실 우리 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는데.

우리 남매 중에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건 항상 나였다.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 둘째 딸은 아빠 주머니가 밑 빠진 독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빼앗았고, 아빠는 알면서도 빼앗겨왔다. 내 친구들이 부모님 용돈 봉투를 챙기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러했다.


나는 여전히 내 청춘을 팔아 버는 푼 돈으로 나 혼자를 키우기에도 여력이 없다. 어떻게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사 남매를 먹여 살려 왔는지 이제야 당신 어깨에 얹힌 나의, 우리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아이처럼 웃는 아빠를 보며 생각하건대
내 젊음을 절반 떼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만 더 천천히 시간이 흐른다면
나는 절반만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아빠의 나이 듦을 나의 철듦이 따라가지 못해서
내 욕심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그의 곁에 묶어두고 싶다.


어렸을 때는 생일이 되면 아빠와 함께 집 옆의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게 이벤트였는데. 지금은 가방 가게로 바뀌어버린 동화 서점에서. 두 권도 안되고 제일 읽고 싶은 책 딱 한 권을 고르느라 책장 앞을 얼마나 서성였던지.
고심 끝에 택한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총총 걸어오던 그때, 그 딱 한 권이 주던 행복. 젊었던 아빠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던 나.


나의 뿌리이자 근원, 태초이며 고향인 당신.
사랑이라는 단어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욱여넣은 날이면 쉬이 말해지지 않는다.
그 어떤 말보다 더 진하고 밀도 높은 단어를 입안에서 한참을 굴리다가 한 음절씩 밖으로 꺼낸다. 머뭇거리며. 심장에서부터 꺼내 올려진 뜨끈한 사랑을.
눈을 감고 미소를 짓거나 가끔은 울컥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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