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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Jan 06. 2019

삶의 무게


서울에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자극적인 기사 사이로 ‘삶의 무게’라는 제목의 사진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눈 길에 폐지가 잔뜩 쌓인 리어카를 끄는 노인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 한 장에 담긴 메시지로 지난여름이 떠올랐다.


매일 최고온도를 찍던 한 여름, 나는 친구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던 전시관 겸 카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가씨, 저쪽이야. 큰길로 쭉 올라가서 왼쪽!”




우리처럼 헤매는 사람들이 많은지 길을 가던 아저씨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길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언덕을 올라 카페 입구에 도착하니 그 좁은 길에 차가 빼곡했다.

카페 앞마당 주차공간마저 부족해 골목까지 고급 외제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있었다.


언덕을 오르면서도 차 없는 사람들은 못 오겠다 싶었는데 상상외로 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이 많은 차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왔나 싶어서 놀란 내가 물었다.




“여기가 이런 동네였어?”


“아니 여긴 온통 미싱공장만 있는 동네인데?”




주위 다른 건물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모습에 친구도 어리둥절해했다. 카페로 들어가는 길 부터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기분이었달까.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건물은 멋스러웠다. 외벽엔 커다랗게 전시 포스터가 붙어있고, 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SNS용 사진 완성이었다. 건물 외곽부터 카페 안까지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정작 전시는 기대에 못 미쳤었다.



친구와 나는 올라온 길과 반대편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주차되어있던 차들도 하나씩 골목을 떠나갔다.




“왼쪽으로 아니 아니 조금 더 뒤로!”




주차 아저씨와 차주들이 합심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느라 안간힘을 쓰는 사이 우리는 그 사이를 쏙 하고 빠져나왔다.

뚜벅이들은 다신 못 올 곳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려오는 골목에는 똑같이 생긴 문이 여러 개 난 회색 건물이 있었다. 닫힌 문들을 몇 개 지나치기까지는 겨우 몇 발자국 떼지 않아도 되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그 문들이 궁금해서 유심히 보다 보니 그중 한 문이 작게 열려있었다. 작은 틈 사이로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쪽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이고 집이 되는.


할머니는 방문이자 대문일 문을 열어두고 연신 부채질을 하고 계셨다. 오르락내리락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간혹 나와 같은 젊은이들과는 눈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그 짧은 순간에도 한층 더 더운 바람을 몰고 오는 차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내려왔다.

숨이 막힐 듯한 더위였는데 한순간 마음이 싸해졌다.




“이건 참 잔인한 거 같아.”



뜬금없는 말에 묵묵히 길을 내려가던 친구가 영문도 모른 채 되물었다.



“뭐가?”



“이 동네에 이런 카페가 새로 생기고, 이 언덕배기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그런데 바로 옆에는 사람들이 살잖아. 땅값이 오르고 건물이 헐리면 이 사람들은 또 어디로 내몰리나 싶어서.”


“그러게. 아마 양극화는 계속 더 커질 거야.”


걱정한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속상했다.



그 여름, 서울 시장 부부가 옥탑방을 빌려서 산다고 했었다. 한 여름에 에어컨도 설치하지 않고 그렇게 한 달을 날 거라고 매일 같이 기사가 났다.

그들이 옥탑을 떠날 때까지 기사는 이어졌었는데 나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었다. 한 달 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해서였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잠깐 옥탑에서 살아본다고 뭘 바꿀 수 있는 건가.

여기가 아니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을 헤아릴 수 있는 걸까 하고 씁쓸해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보여주기 식이라도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로 인해 우리 사회는 조금씩 달라지는 걸 테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설령 보여주기 식 이벤트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후까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제대로 판단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무분별한 기사와 여론몰이에 한순간 휩쓸리지 않지 않겠구나 싶었다. 이벤트가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외면하지 않고 바라봐야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차는 심해지고, 경계는 모호해지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훗날은 어떤 모습일까.

당장 나의 오늘이 고단하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어둡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웃과 소외된 이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정사각형의 프레임 안보다 그 바깥쪽을 더 궁금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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