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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7. 2020

이성보다 관성의 편을 드는 우리의 평범한 사랑에 대하여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성보다 관성의 편을 드는 우리의 평범한 사랑에 대하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어릴 때,라고 해봤자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맹숭맹숭한' 결말의 영화나 책을 싫어했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이뤄진 건지 아닌 건지, 어쨌다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들. 시간이 지나고 짧은 시간 동안 내 안으로도, 밖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고 나서야 과거의 내가 이게 뭐냐고 한탄했던 이야기들이 사실 지독하게 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 같은 초콜릿의 끝 맛은 사실 씁쓸한 것처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환상은 거두고 덤덤한 태도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사랑의 맨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분량이 제법 짧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세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각각 자신이 직접 기술한 것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아니, 실존하는 주인공들이 직접 수필을 쓴다고 해도 이토록 자세하게 그려낼 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지낸다. 대개는 그렇다. 폴, 로제, 그리고 시몽의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를 읽으며 깨닫는 것은 결국 사랑의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강은 사랑을 믿냐는 질문에 자신이 믿는 것은 열정뿐이라 대답한 바 있다. 인간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쉽게 권태로워하는지, 그리고 때로는 정답에 상관없이 이성보다 관성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하나의 과장 없이 덤덤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두고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의 하룻밤을 즐기지만 그와의 연애에 권태감을 느끼면서도 끝내 로제를 선택하는 폴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하지만 사실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좋은 남자가 아니고, 젊고 잘생긴 데다가 자신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는 시몽이 있음에 불구하고 폴은 로제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마지막 문장에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책장을 덮을 때까지 정말 여러 번 감탄했다.  


   감정이란 언제나 불안정하고 미묘하다. 사람 사이의 감정이라면 더욱 그렇고 그중 최고는 사랑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읽은 슬픔은 가끔 불쑥불쑥 저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 달을 꼬박 울면 그럭저럭 잊히기 마련이고, 세상에 다시없을 내 사랑은 헤어짐과 동시에 '그 개새끼'가 돼버린다.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통해 이 마냥 아름답고 빛나지만은 않은 사랑의 덧없고 애매모호함을 과장 없이 묘사하고 있다. 제목은 곧 시몽이 폴에게 정식 데이트를 신청했던 쪽지의 부분이기도 한데, 프랑스인들은 대다수가 브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브람스 역시 14살 연상의 연인을 평생이고 사랑했다는 책 밖의 지식을 통해 또 다른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본문에서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의문문이지만, 왜 선뜻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줄임표로 제목을 대체했는지 궁금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니,,' 하고 쪽지의 내용을 되새기며 그동안 권태감에 푹 절어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먹고사는 문제 외에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다는 취향의 결을 다듬는 일을 등한시하지 않았던가 되돌아보는 폴의 성찰을 강조하는 건 아니었을까?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등장인물이 거대한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폴을 중심으로 한 시몽과 로제 세 사람의 감정선에 푹 빠질 수 있는 책이었다. 쉽게 변하고 덧없다 해도, 인생은 어쨌든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감정 관계를 만들어가며 흘러가고 그것이 내 세계에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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