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 Oct 28. 2022

영화 <토니 타키타니> 비평문

     


홍자





- 조우하다       


“한때 인간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박동 소리를 듣고 놀라 기겁을 하며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중략)…. 그렇게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참 신기한 일이다. 처음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체 겉면에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육체 내부 하나하나까지 면밀히 밝혀내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이 맡은 역할들과 작은 반응 하나하나까지 관찰해내어 이름을 붙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감정’들을 더 세밀하고 치밀하게 분류해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더 많은 ‘감정’들이 탄생했다. ‘사랑’, ‘행복’, ‘긴장’, ‘공포’의 발견에서 ‘수치’, ‘연민’, ‘고독’의 발견으로, 그리고 ‘중독’, ‘공황’과 같은 것들의 발견까지. 한 때 ‘사랑’으로 치부되던 것들은 모성애, 애착, 집착 등의 개별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떤 사랑은 질병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느낌과 신체적 반응들을 기준으로 ‘확실성의 느낌은 제공하나 변화의 여지 또한 내포하는’ 무수한 감정들을 만들어냈고, 그 덕에 우리는 내면의 사사로운 변화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이름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세상에 나왔고, 그와 동시에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과 ‘타키타니’라는 일본식 성이 만나 만들어진 ‘토니 타키타니’가 그것이다. 그렇게 그는 태어났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젠 삶을 배울 차례였다. 삶을 배운다는 것은 크고 작은 세계를 이해하는 공통의 방법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즉, ‘나’를 사회에 속하게 만들어주는 것들, 예컨대 언어, 규칙, 법, 관습, 문화 등을 배우고, ‘나’를 다시 개체로써 살게 해주는 것들, 즉 나의 감각과 반응을 각 각의 감정들로 분류하는 방식들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이 있어야 우리는 사회 속에 적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 내면의 세계를 탐험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그렇듯 ‘토니’도 삶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환영받지 못할 이름만을 남긴 채 세상에 던져놓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람은 세상에 던져지면 생존을 위해 적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를 개체로 살게 해주는 것들은 여러 감정을 느낄 상황과 또 그 감정들이 경험되고 적용되며 변주되는 상황들이 필요하기에 혼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토니’는 ‘경험’을 경험하지 못한 채 ‘나’의 세계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는 말했다. ‘외롭다고 생각한 적 없다’라고. 그렇게 그는 감정의 부재, 실재적 감정의 부재라기보다는 내면의 것들을 감정의 이름으로 분류해내지 못해서 발생하는 감정의 부재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코’를 만나고 난 후, ‘토니’는 말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잃어왔던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여기서 그가 말한 ‘어렸을 때부터 잃어온 모든 것’은 아마 다른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되는 여러 감정의 구분들일 것이다. ‘토니’는 그의 감정에 고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 느낌이 고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고독하지 않은 상태도 없었고, 그것이 고독이라 알려주는 사람도, 또 그것이 고독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고독하지 않은 상태를 경험했고 그래서 자신의 외로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그 감정이 실체를 가지고 존재감을 드러내듯이 그의 감정들은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세계를 되짚어 나갔다.    



  

- 상실하다       


 1945년,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로 인해 투하 지역에 있던 생명체와 문명의 흔적들 모두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며 그 지역은 영구봉쇄 되었다. 이 비극을 경험하고, 경험했던 사람들 속에서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은 환영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 묘한 표정을 짓거나 혹은 화를 내곤 하는 것도 당시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의 불쾌함을 마주할 때마다 상처받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관계를 맺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하고, 그 이름은 상처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본인을 환영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과 거기서 비롯된 관찰은 사람을 더욱 비참한 상태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니는 마치 어긋나는 본인의 이름과도 같이 세상과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긋남이 그를 두 개의 운명으로 이끌었다. 첫 번째는 그의 직업인 기계 일러스트레이터다. 기계는 모든 부품이 역할에 맞게 ‘꼭 맞물려 돌아가는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체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그 직업을 택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두 번째는 ‘에이코’였다. 그는 그녀와 그녀의 옷이 ‘꼭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한순간에 빠져들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마치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았고, 그래서 세상에 자신의 자리가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빠진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토니가 본인의 어긋남을 인지하지 못했더라 하더라도 그 어긋남은 마치 자석처럼 어긋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 그를 그곳으로, 그 사람에게로 이끈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토니’의 세계에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마치 방 한 칸을 가득 채워버린 그녀의 옷처럼. 그러나 그 존재의 자리가 익숙해질 때 즈음 상실은 마치 사고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한순간 깨져버린 유리잔처럼. 그가 맺었던 관계는 상실을 동반하며 끝이 났다. 잃어왔던 것을 알게 해준 것도 그녀였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려준 것도 결국 그녀였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들과 그 감정들을 몰랐다면 알지 못했을 상실의 감정은 그에게 너무 낯설기만 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그녀의 옷들을 그녀와 비슷한 체형을 가진 사람에게 입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죽음을 유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혹은 어쩌면 세계에 자신의 자리가, 존재 당위가 있어 보였던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니의 바람은 죽은 그녀의 옷을 입은 사람이 울음을 터뜨릴 때 사라져버린다. ‘어쩐지 눈물이 나서’ 운다는 말에 ‘토니’는 ‘에이코’의 죽음을, 본인이 상실을 겪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 지속되다      

 무언가의 상실 후 남겨진 사람은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의 시작이 탄생이듯 삶의 끝이 죽음이며 그러기에 삶이란 말 속에 죽음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인은 아무 이유 없이 강제로 수용소에 넣어졌다. 그 한 뼘의 수용소 바닥에서 죽음의 근거리를 겪은 이가 바로 토니의 아버지인 ‘쇼타부로’이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이가 바로 ‘토니’다. 그리고 또, 얇은 선을 경계로 죽음으로 간 이가 바로 ‘에이코’였다. ‘삶’을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또한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 남겨진 이들을 위해 시간은 망각을 선물한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음반도, 에이코가 남긴 옷도, 그리고 떠나간 사람도,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물건도, 추억도, 그리고 남겨진 사람의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식되고, 변색되고, 그렇게 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하나, 시간의 영향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딱 한 번이라도 사랑을 알았던 경험, 고독하지 않았던 경험은 우리 안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긴다는 건, 우리 내면과 일상의 일부로 그 사람을 들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상실까지도, 그렇게 생겨버린 빈자리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상대에 대한 기억은 망각되고, 물건은 부식되겠지만, 그 사랑과 상실의 경험은 우리 몸에 아로새겨져 시간의 바깥에 머무를 것이다. 결국, 삶엔 죽음이 존재하듯 또 다른 사랑엔 새로운 상실이 딸려오겠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알면서도 사랑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토니는 그렇게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끼며 숨쉬기를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언젠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기에. 











#영화리뷰 #영화토니타키타니 #토니타키타니 #토니타키타니후기 #영화후기 #영화비평 #토니타키타니비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