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비평문
사랑은 왜 하필 유리 같은 것일까. 사랑이 그렇게나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자그마한 실수로도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 말고, 뜨거운 불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유리 말고, 바깥과 안쪽에 온도 차이가 발생하면 김이 서리는 유리 말고 아주 단단해서 쉽게 형태가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주 유연하고 탄력적이라 웬만한 충격에도 잠시 흔들릴 뿐 금세 제자리를 찾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사랑이 어떤 것과 같아야 한다면, 그건 유리라는 걸.
쏟아지는 빛을 반사해 내 눈을 멀게 한 주제에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깨져버리고 그렇게 깨진 조각으로 나를 찔러버리는, 언제까지나 선명하고 투명하게 반짝거릴 것처럼 굴어놓고 금세 더러워지고 김이 서리는 그런 유리라는 걸.
천사, 사랑해, 사랑해. 삐삐에 떠오른 숫자를 보고 은희가 웃는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던 은희는 그 순간 또렷해진다. 같은 반 아이들이 뒤에서 은희를 두고 ‘저런 애는 공부도 못하고 대학도 못 가서 우리 파출부 할 거야.’라고 말하든 말든 아빠의 감시를 피해 언니 수희가 옷장에 숨어있든 말든 아빠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자신과 언니를 부끄럽다고 하든 말든 엄마가 학원 마치고 돌아오는 오빠에게 밥을 차려 주라고 하든 말든. 남자친구인 지완과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눌 때 은희는 반짝반짝 빛난다. 말갛게 웃는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동안, 뚜렷하고 확실하게 흐르는 사랑을 느끼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은 튼튼해진다. 신기할 정도로 강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거나 자신이 해롭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니까. 사랑은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니까. 중학생인 은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라는 걸. 그러니 생각한다. 사랑받고 싶다고.
학교에서는 따로 어울리는 친구가 없어 보이는 은희이지만, 한문 학원에 가면 함께 ‘고돌이’의 센스를 구리다고 욕할 지숙이 있다. 은희와 지숙은 속엣말을 나누며 방방 위에서 뛰어오른다. 방―방. 은희와 지숙은 ‘베프’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를테면 자신들을 때리는 오빠에 관해서. 생일인데도 때리는, 차라리 내가 자살해 죄책감에 찌들었으면 좋겠는 오빠에 관해. 그런 무시무시한 말이라 하더라도 지숙과 함께일 때 은희는 웃고 말도 많이 한다. 한문을 가르치는 ‘고돌이’의 눈을 피해 노트 한 구석에 지숙이와 필담을 나누기도 한다. 방―방 뛰어오르는 은희는 또다시 반짝거린다.
지숙이와 콜라텍에 간 은희는 자신과 친해지고 싶었다던 한 학년 후배 유리를 만난다. 엑스를 맺자며 번호를 알려달라는 유리, 삐삐 답장이 없어서 찾아왔다는 유리, 그냥 생각이 나서 샀다며 장미꽃을 건네는 유리. 은희는 그런 유리가 싫지 않다. 갈구하던 사랑이 아니라, 비슷한 크기로 오가는 사랑이 아니라, 한쪽에서 압도적으로 크게 퍼부어주는 사랑. 그런 사랑 앞에서 은희는 몸이 조금 꼿꼿해진다. 은희는 유리와 함께 노래방에 가 노래를 부른다. ‘정말 몰랐어요. 사랑은 유리 같은 것.’
-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온 세상에 많이 있으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음악처럼 흐르지 않는다. 그보다 더 자주,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으로 불협화음을 내며 지나간다.
눈이 사슴 같다는 말을 하던 지완, 어두운 건물에 들어가 몰래 입을 맞추던 지완은 어느 순간부터 은희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 지완의 연락을 기다리던 은희는 학교에서 다른 여학생과 붙어 있는 지완을 발견한다. 은희는 그 모습을 창문에 서서 지켜본다. 지숙은 은희와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다 주인에게 걸리자 은희네 떡집을 불어버린다. 은희는 지숙의 행동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사과하라며 화를 내지만 지숙은 미안하다는 말없이 은희를 떠난다. 가족들에게 대훈이 자신을 때린다고 말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너희들 싸우지 좀 마.’이다. 어제는 심각하게 싸웠던 부모님이 오늘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웃기도 한다.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지만 일은 벌어지고 사람은 떠나간다. 사랑은 확실히 유리와 같다. 이렇게나 쉽게 깨져버리니까. 깨지는 순간 여린 피부를 스쳐 상처를 내니까.
모든 일이 나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 같을 때, 은희는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선생님인 영지와 가까워진다. 영지는 자기소개는 안 하냐는 지숙의 말에 그럼 번갈아 가며 소개하자고 한 사람, 만화를 좋아한다는 은희의 말에 저도 만화 좋아해요, 답해준 사람이다. 영지는 은희를 바라봐 주고 은희를 궁금해 해주고 은희에게 질문을 한다. 은희는 뭘 좋아해요? 그럼 넌 어떻게 해? 하고. 사랑은 또다시 찬란하게 빛나며 은희에게 찾아온다.
물어봐 주는 사람에게는 반대로 어떤 것이든 물어볼 수 있다. 그래서 은희는 영지에게 묻는다.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 있으세요?’ 영지는 답한다. ‘응. 많아. 아주 많아.’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버려지는 모든 것이 다 자기 같아 수술로 떼어낸 혹까지도 어디로 가버렸냐고 묻는 은희는 의사에게 수술 부작용을 듣고 대기실에 앉아 우는 아빠를 멀뚱히 바라보고, 수술을 앞둔 저녁 식사에서는 모든 가족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는 걸 느끼며 자그맣게 좋아한다. 다시 돌아온 지완이를 받아주고 ‘물론 중간에 쉬긴 했지만, 그래도 120일은 120일’이라며 테이프에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한다. 지숙이와는 서로 울면서 화해하고, 유리는 귀고리를 들고 병문안에 와 은희의 볼에 입을 맞춘다. 떠나버린 것 같았던 사랑은 다시 은희에게 찾아 흐른다.
어떤 사랑은 동글동글 잘 닦인 유리 같지만 어떤 사랑은 이미 깨진 유리라서 날카롭고 언젠가 날 다치게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은희는 매번 사랑을 덥석덥석 잡는다. 그래서 때로 은희는 화가 난 아이 같다. 사랑받고 싶은데 번번이 먼저 사랑해버려서 그게 너무 화가 나는 아이.
영지는 병원에 입원한 은희를 찾아와 집보다 병원이 더 편한 것 같다는 은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알았지?’ 은희는 알겠다며 영지와 약속한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은희와 영지는 마주 보고 웃는다.
시간이 흐르면 깨끗했던 유리가 더러워지는 것처럼 괜찮아지는 것 같았던 일상은 다시 조금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지완은 은희를 향해 ‘쟤가 그 방앗집 딸이니?’하고 묻는 자신의 엄마를 따라 떠나버리고, 퇴원하고 돌아온 집은 텅 비어 있다. 그냥 언니가 좋아요, 말하던 유리는 새 학기를 맞이하자 은희를 피한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묻는 은희에게 유리는 말한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지숙은 계속 유리 이야기를 하는 은희에게 ‘너 그거 알아? 너 가끔 네 생각만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유리는 언뜻 고체로 보이지만, 사실 액체에 가깝다. 그러므로 유리는 흐르는 성질을 가졌고, 유리를 닮은 사랑 또한 그렇다. 흐르고 흘러버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설상가상 영지는 아무 말 없이 학원을 떠나고 그 일로 은희는 학원 원장 선생님과 사이가 틀어져 학원에서 쫓겨난다. 은희가 학원에서 쫓겨났음을 알게 된 은희의 부모는 무작정 은희를 욕하고, 대훈은 부모님 앞에서 대놓고 은희의 뺨을 내리친다. 그 순간에도 아빠는 ‘어디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리냐’며 대훈을 혼낸다. 포인트는 자신의 권위에 있다.
수술 소식을 듣고 울었던 아빠와 대훈의 폭력을 묵인하고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아빠. 아무리 불러봐도 돌아보지 않는 엄마, 밥 위에 고기를 얹어주는 엄마, 네가 성격이 더러워 학원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하는 엄마. 좋아한다고 했다가 아무런 언질 없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래놓고 다시 떠난 지완. 친한 친구였는데 결정적인 순간 날 배신하고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지숙. 나를 그냥 좋아한다고 해놓고 그건 지난 학기였다고 말하는 유리. 은희에게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마치 고체로 보이는 저 유리가 사실은 액체인 것처럼.
은희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마구 흔들면서 화를 낸다. ‘내 잘못 아니야. 나 성격 안 나빠. 나 성격 안 나쁘다고.’ 모든 사랑이 혼란스러움에도 여전히 명료하게 반짝거리는 사랑을 따라서. 맞서 싸운다.
은희는 울면서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언니가 사고 난 버스에 탔을지도 모른다며. 그날 저녁, 식탁에는 수희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모인다. 아빠는 버스를 늦게 타서 다행이었다고, 엄마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을 하고 대훈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은희와 수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은희는 영지에게서 소포를 받는다. 영지에게 빌려주었던 책과 스케치북, 그리고 편지. 은희는 답장을 쓴다. ‘언젠가 제 삶도 빛이 날까요?’ 답장과 떡을 가지고 은희는 영지를 찾아간다. 그러나 영지는 이제는 없고, 은희는 영지의 침대 위에서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여 본다. 어느 새벽 은희는 수희와 수희의 남자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무너진 성수대교가 보이는 곳으로 간다. 아직 먹먹한 하늘 아래 세 사람이 조용히 선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모두 다 이야기해 준다던 사람은 이제 없다.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콩가루 같은 가족도, 자신의 엄마와 함께 떠나가더니 다시 찾아온 지완도, 지난 학기뿐인 사랑이었던 유리도 그래도 아직 존재하는데 가장 단단하고 투명하다 믿었던 영지는 없다.
정말 이상하다. 외삼촌이 없는 게 그냥 이상하다던 엄마의 말처럼. 부재는 어떤 방식으로 견뎌야 할지도 알 수 없게 찾아온다.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걸
이제 깨어지는 사랑의 조각들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에요
사랑은 정말이지 유리 같다. 아름답게 빛났다가 깨져버리고, 상처를 주고, 아프고. 그런데 유리는 액체라서 어떤 사랑은 이미 피와 함께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영지의 말을 은희가 계속 기억할 것처럼.
사랑은 언제까지나 유리 같은 것이라서 번번이 깨지고 빛나고 단단하고 부서지겠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다운 곳이라서 은희가 계속해서 살아갈 것처럼.
은희는 강한 아이이다. 번번이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누군가를 좋아하기를 멈추지 않는 아이이니까. 유리 같은 사랑의 아름다움에 언제든 매료되는 아이이니까. 그러니 은희는, 은희들은 언제나 우리의 이상함을 사랑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것.
사랑을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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