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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Sep 02. 2022

비로소 새봄

영화 <윤희에게> 비평문

비로소 새봄


토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꽃이 피고, 해가 길어진다. 성큼 다가온 봄기운은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만, 통계적으로는 4월과 5월이 우울증이 가장 극심한 달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봄은 겨울보다도 더 차갑고 혹독하리라. 영화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어쩌면 끝도 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보다도 더 차갑고 무거운 봄을 수십 번도 더 보냈을지도 모른다. 봄이야 매년 돌아오지만, 윤희에게 있어서는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바로 그 봄이야말로 비로소 새봄이었다.






윤희의 겨울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신에게 벌을 받는 인간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절벽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벌을 받았다. 파먹힌 그의 간은 밤사이에 새로 돋아나서 그는 매일 반복되는 벌을 받아야 했다. 하데스를 속여 저승에 가지 않은 시시포스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벌을 받았다. 그가 바위를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러면 그는 다시 반대편으로 내려가 바위를 올려다 놓기를 무한히 반복해야 했다. 이들이 받는 벌들의 공통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고통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이다. 


  윤희는 쥰과 헤어진 이후, 평생을 스스로에게 벌을 주며 살아왔다. 쥰을 떠난 윤희의 시간은 겨울이었다. ‘나로 살기’를 멈춘, 생명력의 불씨가 꺼져버린 고요한 겨울을 윤희는 계속해서 살았다. 영화 속에서 쥰과 마사코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계속해서 치우는데, 눈을 싫어하는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마치 벌을 받는 모양새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쥰과 마사코가 눈을 치우는 일을 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겠지만, 어쩌면 윤희가 살아오는 동안에 스스로에게 주던 벌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프로메테우스와 시시포스가 받은 벌처럼 끝을 모른 채 반복되는 고통의 시간을 윤희는 그저 묵묵히 그치지 않는 눈을 치우듯이 버텨온 것은 아니었을까.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하고 억지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윤희가 스스로에게 준 벌과는 별개로, 타의에 의해서 받아야 했던 벌이었다. 윤희가 인호와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그 벌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인호는 윤희가 사람을 외롭게 한다고 말했다. 윤희는 인호를 외롭게 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쪽도 충만해지지 못했던 그 관계는 결국 끝이 났지만, 윤희가 스스로에게 주던 벌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엄만 뭐 때문에 살아?

자식 때문에 살지.


  예상치 못한 대답은 아니지만 윤희의 입에서 나온, 자식 때문에 산다는 그 말은 어쩐지 흘려 들을 수가 없다. 끝없는 겨울을 살아가고 있는 윤희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자식의 이름이 ‘새봄’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윤희가 지어줬을 그 이름, 새봄. 윤희가 원하던, 그리고 젊은 날의 윤희가 가졌던 그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새봄이라는 이름의 아이. 윤희는 그 아이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자신은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새봄만큼은 대학에 가서 더 배울 게 없을 만큼 배웠으면 좋겠고, 무리해서라도 새봄이 가고 싶어하는 여행은 함께 다녀오고 싶었다. 그렇게 윤희는 자식 때문에 살았다. 자기 자식을 위해 사는 삶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윤희가 돌아본 자신의 삶은 충분히 ‘나로 살았’다기보다는 삶의 이유를 자식에게서 찾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벌을 받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삶의 이유가 스스로에게 있지 않은 한, 그에 따른 고통은 멈출 방법이 없으며 고통의 종식을 위해서는 그저 삶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윤희의 봄


  그런 윤희에게 새봄은 ‘새봄’을 가져다 준다. 쥰의 편지를 본 새봄은 두 사람에게 우연인 듯 운명 같은 재회를 선물해 줄 작정으로 윤희를 데리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무모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새봄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윤희는 여전히 쥰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묻어 두었던 과거와 다시 마주했고,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한국에서 비로소 ‘나로 살기’를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윤희가 스스로에게 주던 벌을 멈춘 것이다. 눈이 그치고 해가 떠오르듯, 비로소 ‘새봄’이 왔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지속함에 있어서 상대방의 ‘나로 살기’를 위해 본인의 ‘나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그 관계는 비틀릴 수밖에 없다. 일본에 가기 전, 윤희가 스스로의 ‘나로 살기’를 멈추고 새봄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로 인해 비틀린 새봄과 윤희의 관계성은 둘의 여행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윤희와 새봄의 관계가 망가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엄마에게 ‘새봄’을 가져다 준 새봄의 행동이 강요와 의무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 새봄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둘째로는 이 여행 속에서 새봄이 자신의 ‘나로 살기’를 제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윤희를 쥰과 만나게 하면서도 새봄은 경수와 만났고, 사진을 찍었고, 대학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윤희가 다시 ‘나로 살기’를 시작할 때에도, 새봄은 대학에 갈 준비를 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나로 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윤희의 봄과 새봄의 봄은 같은 시간에 존재할 수 있었다.





보내지 않은 편지


  봄이 오고, 윤희는 쥰에게 답장을 썼다. 쥰에게 그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윤희는 적었다. 사실 편지를 보내든 보내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답장을 쓰게 된 시점의 윤희가 더 이상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그리고 입안에 머금고만 있던 그 이름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결혼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만이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듯이, 윤희가 편지를 부치지 못했더라도 그 편지가 윤희를 계속해서 윤희로 살게 해준다면 편지가 갖는 의미는 그걸로 충분하다. 


  사실 나는 윤희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지를 두 장씩 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편지를 보내고 나면 쓴 사람에게는 더 이상 편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윤희가 그 편지를 보내지 않고 고이 간직했으면 좋겠다. 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 그 기분을 영원히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편지를 꺼내 보며 쥰아, 하고 소리 내어 읽어 봤으면 좋겠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비로소 새봄이 왔다는 것. <윤희에게>는 그렇게 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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